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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불견 「무소신」/이규진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요즘 정가에는 민주자유당(가칭)에 합당키로 한 민주당의원들의 거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민주당이 야당간판을 내린 것과 동시에 일부 의원들의 잔류선언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택ㆍ김정길ㆍ노무현ㆍ김광일의원에 이어 2일에는 장석화의원이 김영삼총재와 정치적 결별을 선언했고 앞으로도 몇명이 더 있을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
이처럼 속출하는 이탈을 막기 위해 김총재측은 내주부터 의원들을 상대로 일종의 「충성서명」을 받을 것이란 소식도 들린다.
이렇듯 정치인들이 정치변혁기에 자기의 소신과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런 선택자체를 나무랄 이유가 없다.
문제는 일부의 이합집산 과정이 너무나 무소신ㆍ무지조해서 과연 국민의 대표라는 사람들이 저렇게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점이다.
민자당 통합추진위원이 되어 청와대에서 축배까지 들었던 중진이 하루아침에 돌변하는가 하면 이쪽에 가서는 이말하고 저쪽에 가서는 저말하는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는 사람이 지금도 즐비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의원은 신당에 가면 어떤 자리(각료)를 줄 것인가를 김영삼총재측과 흥정하면서 뒤로는 잔류파들에게 곧 합류할 듯한 언질을 흘리고 있다.
「이리 갈까,저리 갈까」 우왕좌왕하는 그들의 태도보다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더블플레이가 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집권당의 간판을 내리게 한 쾌거』 『신사고에 의한 명예혁명』이라고 합당결단을 스스로 찬양한 김총재측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처럼 뚜렷한 명분과 확실한 자신감이 있었다면 왜 전당대회에서 날치기 통과라는 비난을 듣지 않게끔 떳떳한 절차를 밟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저 의원들을 과거의 사정으로 묶으려 애쓰는 모습은 안쓰럽기조차 하다.
그토록 오래 야당지도자를 역임했으면서도 큰 정치인답게 『내 뒤를 따르라』고 한마디로 끝내지 못하는 그의 리더십에서 허무를 느낀다는 지적도 적지않다.
유일한 8선의원에다 원내총무 5선,야당총재 4선,그리고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6백33만명의 지지를 얻어낸 경력이 여당으로 돌아서는 순간 마력을 잃고만 것일까.
김총재는 이제 야당지도자로서의 보호막은 사라지고 삭풍부는 광야에 선 「정치초년생」이라는 각오를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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