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보수합동/자민당 35년이 남긴 것: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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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전­좌등 「보수합동」궤도에 올려/경제정책 성공하자 국민들 호응/사회당 내분으로 어부지리… 장기집권 발판 마련
전후일본의 보수정치를 흔히 크게 세개의 시대로 구분한다.
55년 보수합동까지 보수정치의 기반을 만든 요시다(길전)시대가 제1기라면 제2기가 안보파동과 고도성장으로 대표되는 이케다(지전)­사토(좌등)시대,그리고 록히드사건과 리크루트 스캔들로 얼룩진 다나카(전중)­나카소네(중회근)시대가 제3기다.
이중 제2기가 이른바 「보수합동」의 틀을 굳히고 자민당 장기단독정권이 35년이나 지속되는 발판을 마련한 안정기로 꼽힌다.
이시대를 통해 일본국민은 우연하게 탄생한,세계에 유례가 드문 자민당 파벌정치를 「최선의 선택」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이 가장 빨리 고도정보사회로 진입할수 있는 국민적 컨센서스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교훈적이다.
55년 자민당이 출범할 당시만해도 「보수합동」이 과연 일본정치에 밝은 미래를 보장할수 있겠느냐고 많은 일본인은 회의적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자유당과 민주당의 양거두 요시다와 하토야마(구산)간의 헤게모니 다툼이 10년간의 역사를 갖고 있어 과연 요시다가 약속대로 은퇴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둘째,합당이후 기득권 배분문제에서 순조롭게 양당이 승복할 수 있는 황금분할(총리ㆍ총재분리론)이 이루어질 것인지 셋째,상승세에 있는 사회당의 기세를 꺾을 방도가 있을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야당 자유당의 보스 요시다는 약속을 지켜 끝까지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데다 초대 자민당 총재로 선출될 자유당게 오가타다케도루(서방죽호)가 56년1월 갑자기 죽음으로써 민주당계 하토야마로 권력이 일원화되는 행운이 따랐다.
결과적으로 보면 자민당 탄생의 대의명분이었던 ▲혁신세력 대두의 견제 ▲경제성장체제의 구축은 완전히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이는 기시이후 이케다­사토정권을 탄생시키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회당은 60년1월 안보논쟁을 계기로 사회당내 우파 니시오(서미)가 40명의 중의원 의원을 이끌고 민사당을 창당함으로써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63년 선거에서 4석이 줄어 1백44석,69년에는 1백석에서 크게 모자라는 90석으로 최악의 의석수를 기록했다.
특히 62년3월 사회당 서기장 에다(강전삼랑)가 『사회주의의 목적은 높은 생활수준ㆍ사회보장ㆍ의회민주주의에 있다』는 에다비전을 내걸고 사사키 고조(좌좌목경삼)와 좌파논쟁을 벌임으로써 사회당의 혁명노선이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64년 동경올림픽과 70년 오사카(대판) 만국박람회로 이어지는 전후 일본 최고의 호황시대가 사토장기정권과 맞아 떨어짐으로써 대조를 보인다.
사토내각은 64년 11월9일부터 72년7월6일까지 7년8개월간의 최장수 내각을 기록했다.
이같은 장기집권이 가능했던 이유로 많은 전문가들은 ▲경제고도성장의 가속 ▲인사의 수완과 행운 ▲야당의 저락등을 공통적으로 꼽는다.
사토정권시대의 호황기는 이자나기 경기(건국 이후의 경기)라고 부르지만 모든 지표상으로 경제는 급성장했다. 65년11월부터 70년7월까지 57개 월간 경제는 계속 확대되어 명목 GNP는 68년 서독을 앞질러 세계 제2위가 되었고 무역수지는 흑자로 정착됐다.
카(자동차)ㆍ쿨러(냉장고)ㆍ컬러TV등 이른바 3C시대라고 부르는 대량소비시대가 이때부터 시작돼 67년말 TV수상기 보급대수는 2천만대를 돌파한다.
60년 안보투쟁을 분수령으로 노사분규가 50년대 정치투쟁에서 「춘투」라는 임금투쟁으로 전환하는 것도 이시대 특징의 하나다. 【동경=방인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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