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으로 「제2의 삶」가꾼다/귀순자선교회(마음의 문을 열자: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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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낯선 생활에 한때는 방황/김신조ㆍ김만철ㆍ신중철씨 부부가 앞장
흰눈이 쏟아지기 시작하던 21일 오전10시­.
서울 신길3동 성락교회 부속사무실.
10평 남짓 방안에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어온 귀순자 40여명이 모였다. 「사단법인 월남귀순용사선교회」 1월모임. 『북을 뒤로 할때 우리는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질적 사회는 저희를 시련에 들게했습니다. 갈등과 방황,외로움에 떨던 어린양은 이제 당신의 영원한 사랑안에서 진정한 자유,구원의 손길을 얻었습니다.』
꼭 22년전 68년1월21일,『청와대를 까부수러 왔다』던 124군부대 공비 30여명중 유일한 생존자이자 선교회의 산파역인 이사장 김신조씨(49)의 간증.
현재 침례교신학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김씨가 전향후 자신에게 주어진 세속적 삶을 마다하고 불우한 동료와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종교인으로 변신한 것은 결코 우연일수 없었다.
70년 최정화씨(46)와 결혼,두자녀까지 둔 김씨는 당국의 주선으로 삼부토건에 입사,과장까지 승진해 외견상으로는 분명히 앞길이 보장돼 있었다. 『처음에는 기자회견ㆍ인터뷰ㆍ강연 등 꽉 짜인 스케줄때문에 잡념이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견딜수 없는 인간적 고뇌에 시달렸습니다.』
고향인 함북 청진에 사는 부모가 처형당하고 6형제가 모두 수용소로 쫓겨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길에서 그를 알아본 사람들의 『저기 무장공비 간다』는 수군거림은 차라리 자본주의가 선물한 유명세로 여겨 이겨냈다. 그러나 두자녀와 부인에게까지 「무장공비 가족」이라고 손가락질을 보낼땐 인내의 한계를 넘어 자제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술과 노름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자신을 죄어오는 고통에 비례해 늘어만가는 주량. 눈물로 말리는 부인은 손찌검의 대상일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인에게 내려진 위암선고.
『부모형제와 피해자유가족,집사람에 대한 죄책감에 1월21일 그날 자폭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부인 최씨는 성락교회 김기동목사(53)의 인도로 종교에 귀의,믿음으로 병마를 이겨냈다.
『면류관에 십자가를 든 예수의 모습에서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81년 4월30일. 김씨는 이날 뜻하지않은 발견에 끌려 교회를 찾았고 신기하게도 마음의 고통이 씻겨졌다.
82년 집사가 된 그에게 자신과 마찬가지 고통을 겪는 동료 귀순자들의 안타까운 현실이 절실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한 귀순자는 보상금을 탕진하고 무면허운전을 하다 사고를 냈다.
유관기관마저 『포기했다』는 그를 위해 동료들과 함께 탄원서를 제출하고 합의금 6백만원까지 모아주었다. 그가 선교회 회원이 된것은 물론이었다.
회장으로 추대된 김만철씨(51)도 김씨의 전도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케이스.
『아직도 종교는 아편이라는 공산주의 교리를 쉽게 떨쳐버리질 못했어요. 그러나 경쟁사회에서 의지할 곳을 찾았다는 든든함이 의구심을 씻어주고 있습니다.』
88년5월 김씨의 성화로 교회를 찾은 부부집사인 김만철씨 부부는 개인성경과외를 받아가며 구역장까지 맡고 있다. 부회장은 북한군 민사행정경찰참모장을 지내다 83년 5월7일 귀순한 신중철씨(43ㆍ육군중령)가 맡고있다.
매월 셋째주 일요일에 모이는 선교회. 오늘도 간절한 소망을 담은 마지막 기도를 이렇게 맺는다.
『통일의 그날 우리 하나가 된 동포가 어께를 맞대고 어울려 북녘땅에 복음을 전하게 해주소서.』<이하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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