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테러와의 전쟁' 이기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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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인도는 1994년 이래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무려 2만여 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뉴델리는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에 있는 테러 본거지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모두 핵 보유국이다. 만일 인도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에 밀고 들어가 테러 본거지를 공격한다면 인도-파키스탄 간의 전면적인 핵 충돌로 비화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으르렁대면서도 결정적인 충돌을 피하는 것은 교과서에서 말하는 '핵무기의 모순'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적대적인 두 나라가 각자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갈등을 겪기는 하지만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공멸 사태만은 서로 피한다는 얘기다. 이 이론은 인도-파키스탄 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

파키스탄은 미국이 수행하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모순적인 존재다. 파키스탄은 테러와의 전쟁에 나선 부시 대통령의 둘도 없는 동맹국이다. 동시에 파키스탄은 테러의 온상이기도 하다. 파키스탄의 카슈미르와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지역은 빈 라덴의 은신처이며 세계적인 테러 분자 양성소 역할을 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틈만 나면 미국이 인도와 파키스탄과 동시에 관계를 개선한 것을 외교적 업적으로 꼽고 있다. 워싱턴이 견원지간(犬猿之間)인 인도.파키스탄과 관계를 개선한 것은 외교적 성과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워싱턴이 인도.파키스탄과 관계를 개선한 것은 미국에 '전략적 덫'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 예컨대 인도와 파키스탄이 기존의 틀을 깨고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경우다. 만일 인도가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둔 테러리스트들로부터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테러 공격을 받았다고 하자. 그러면 인도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진격할 수 있다. 이 경우 미국은 어느 편을 들겠는가.

내가 보기에는 부시 행정부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한 준비가 안 된 상태다. 현재 백악관과 국무부는 이라크.이란.레바논.팔레스타인.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발목을 잡혀 있고 핵 문제만 해도 북한.이란 문제를 다루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다.

2002년 당시 미 국무부 부장관이었던 리처드 아미티지는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으로부터 파키스탄의 이슬람 극렬 세력이 국경을 넘어 인도를 공격하는 것을 '영구적으로' 중단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무샤라프 자신도 지킬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인도와 파키스탄은 곧 수뇌부가 교체된다. 인도와 파키스탄에 새로 등장할 수뇌부가 과거처럼 인내와 자제심을 발휘할 것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결론적으로 모든 테러분자를 색출, 분쇄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테러와의 전쟁은 지나치게 단순한 처방에 근거하고 있다. 미국이 테러를 분쇄하려면 우선 국내에 극렬분자가 발붙일 자리를 주지 않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한편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갈등을 사전에 예방해야 하며, 무력 사용은 최후에 동원하는 복합적인 처방이 바람직하다.

정리=최원기 기자

마이클 크레폰 미국 헨리스팀슨센터 회장.국제안보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