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살인」 악몽 씻고 7년 오간 인정(마음의 문을 열자: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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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살인범 가족 보살핀 「형사의 바른 손」/남편 처형뒤 자살 하려던 아내 설득/직장 알선해 주며 재생 격려/사경의 아들 수술비도 해결
『남편의 시신은 성당의 신부님과 수녀님이 거두어 주셨어요. 조문객은 물론 일가 친척도 얼씬하지 않았으니까요.』
83년 1월20일 중앙일보 단독보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촬영살인사건」. 범행후 한달이 훨씬 지난뒤 붙잡혀 교수형을 당한 이동식(당시 42세ㆍ한국사진작가회원)의 부인 김모씨(40)는 7년이 지난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는듯 성호를 그으며 조심스레 마음의 문을 열었다.
코흘리개 두 아들을 이역만리 외국인에게 주고 「괴로운 삶」을 청산하려했다는 김씨의 한을 이만큼이라도 풀어낸 사람은 다름아닌 이를 붙잡아 교수대로 보낸 서기만형사(50ㆍ서울 남부서)였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범죄사냥꾼」으로 통하는 서형사의 인간애는 그 자신이 부모를 여의고 자란 고아생활에서 우러나왔는지도 모른다.
이의 가족과 서형사의 인연은 82년 12월14일 오전11시,서울 시흥3동 인적이 드문 호암산 중턱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비롯됐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산을 오르던 이가 숨이 차다며 낙엽위에 앉았다. 동행하던 면도사 김경희양(24)이 나란히 앉았다. 이발소를 드나들며 깊이 사귀던 사이였다.
누드사진을 찍으려면 미리 감기약을 먹어야 한다며 극약이 든 캡슐 2개와 감기약병을 건네줬다.
약을 마신 김양이 몸을 비틀며 쓰러지자 이는 기다렸다는듯 카메라를 들이대고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고통이 시작되는 모습부터 절명하는 순간까지 찍은 21장의 사진은 불명예스럽게도 『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
사건 29일만에 김양의 사체가 발견됐고 그후 1주일만에 이는 집요하게 추적한 서형사에게 붙잡혀 84년 사형이 확정된후 86년 6월28일 교수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김씨는 당시 6세이던 두 아들과 단란하게 살던 서울 가락동 전세 아파트에서 남편이 범인으로 붙잡힌지 1주일만에 주민들에 의해 쫓겨났다.
동네사람들이 몰려와 「살인마의 집」이라고 아우성쳐 한밤중에 몰래 이삿짐을 싸야했다.
서울변두리 달동네의 길도 없는 산꼭대기 외딴 10평짜리 무허가 판자집이었다. 사람을 대하기가 무서웠다.
아이들을 생각해 가재도구까지 팔아가며 구명운동을 했지만 허사였다. 남편 이는 하루만 면회를 걸러도 입에 담지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남편을 묻은후 두아들을 해외에 입양시키려고 알선기관에 맡겼죠. 아들이 입양되는 것을 확인하면 저는 그만 살려고 마음먹었었는데….』
눈을 감으면 온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환영에 시달렸고 눈을 뜨면 두아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괴롭혔다. 빨리 숨이라도 멈췄으면 싶었다.
이때 천만뜻밖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이사온후 첫 손님이었다. 남편을 붙잡아 교수대로 보낸 서형사였다.
『우리가정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사람이라는 적개심이 그대로 남아 있을 때였어요.』
조용히 죽게해달라는 김씨를 서형사는 끈질기게 설득했다. 자식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되풀이했다. 서형사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반복한 「설교」가 얼어붙었던 김씨의 마음을 열게했다.
서형사는 억지로 김씨를 전자회사 공원으로 취직시켰다. 두 아들도 다시 데려왔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13세때 고아가 된후 구두닦이를 하면서 검정고시로 중ㆍ고교 과정을 마친 그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서형사는 이틀이 멀다하고 김씨의 직장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했다.
서형사는 몇년째 발길이 끊긴 김씨집을 명절때마다 선물꾸러미를 들고 찾아갔다.
『얼마전에는 둘째가 복막염으로 사경을 헤맸어요. 그때도 서형사님이 병원비 모두를 해결해 주셨고….』
눈물조차 메말랐다는 김씨는 아들 얘기가 나오자 기어이 울먹였다.
아침7시에 출근해 밤9시가 넘어 귀가하는 김씨의 한달 수입은 20여만원.
그러나 6학년으로 제법 소년티가 나는 잘 생긴 두아들이 반에서 1,2등을 다투며 씩씩하게 자라줘 고달픔도 잊는다고 했다.<이하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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