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空城之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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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국정을 가지고 장난하는 거야 뭐야?" 지난 10일 재신임을 묻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기자 회견 보도를 대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재신임을 위한 국민투표가 위헌이냐 아니냐 등속의 고품격 의문은 고사하고, 신임/불신임의 당첨(!) 확률조차 따져볼 겨를도 없이 또 괜한 일을 저지르는구나 하는 짜증의 폭발이었다.

*** 최도술 비리 '내막'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황당했었다. 그 황당함을 진정시킨 계기의 하나는 학생들과의 대화였다. 재신임 찬반과는 별도로 그런 카드를 던진 대통령의 결단만은 멋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특히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수뢰 혐의에 대해 "입이 열 개라도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언급이 신선하게 전해졌던 모양이다. 대통령이 잘못해도 보필의 잘못이고, 비리가 드러나도 측근의 비리로 돌리던 선례와는 달랐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잘못과 제 책임의 관계나 '내막'이 무엇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다른 하나의 계기는 야당의 반응이었다. 재신임 제의에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고, 민주당 박상천 대표 역시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민투표도 문제될 것이 없으며, 시기도 이를수록 좋다고 밀어붙이는 기세였다. 호박이-정권이-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었으리라. '정신적' 여당인 통합신당만은 재신임이 헌법 위반이라면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아무튼 과반수 의석이 넘는 두 야당이 확실히 태도를 정한 이상 정국의 혼란이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믿고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재신임 회견 사흘 만에 한나라당은 유보로, 민주당은 반대로, 통합신당은 지지로 돌아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재신임 의견이 우세하게 나타나자 서둘러 태도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대통령에게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제 야당마저 닮아가고 있으니. 우리 정치가 기껏 이런 수준이었나? 에이 야당도 못할….

최도술 비리를 끝까지 파헤치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은 백번 옳다. 그러나 그것이 재신임 사태의 본질은 아니며, 더구나 대통령 탄핵이 고작 11억원짜리(?)라면 우리가 너무 초라하다. 재신임 국민투표가 위헌이라면 마땅히 피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이 외치는 법질서 준수에는 왠지 신물이 올라온다. 당헌에 따른 전당대회 개최 요구를 육두문자와 멱살잡이로 찍어누르고 분당 사태를 맞은 것이 불과 며칠 전이어서 그런가? 재신임으로 기울었던 야당을 "정권 찬탈의 망상"이라고 비난하던 통합신당이 돌연 전폭 지지로 간판을 바꾸었다. 남이 하면 망상이고, 내가 하면 무엇이 되나?

재신임 정치에 나는 여전히 황당하다. 그것을 풀어주는 것이 정치권의 책무일 터이다. 거부면 거부이고 수락이면 수락을 분명히 해야 하는데, 거부도 아니고 수락도 아닌 눈치보기 신경전으로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고 있다. 재신임 카드를 던졌을 때 대통령의 인기는 바닥을 헤맸고, 그래서 국민투표는 정권을 건 건곤일척의 도박이었다.

그렇다면 야당도 편법 아닌 정공법으로 돌파해야 한다. 연말 재신임이 가결되면 넉 달 남은 의원직을 던진다는 각오로 맞설 용기는 없는가? 한쪽은 궁지에 몰린 고독한 투사이고, 다른 한쪽은 그에게 딴지나 거는 너절한 싸움꾼으로 비춰진다면 국민의 마음이 어디로 기울지 자명한 일이다. 한쪽은 대통령직으로 배수진을 쳤는데, 다른 한쪽은 의원직 지키기에만 급급하다면 백번 싸움에 백번 질 수밖에 없다.

*** 의원직 지키면 그만이라는 계산

마속이 패한 뒤 사마의가 15만 대군으로 공격할 때 공명의 군사는 2천5백이었다. 공명은 성문을 열고 성루에서 거문고를 퉁기면서 사마의를 속였다. 이른바 공성계(空城計)였다. 루쉰(魯迅)은 공명의 지혜를 치켜세우려다가 되레 그의 면목에 먹칠했다고 꾸짖었지만 나는 '삼국지' 작가의 이 조작이 마음에 든다. 야당의 의심대로 대통령의 재신임 강공에 무슨 암수나 꼼수가 담겼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일단 펼쳐진 판이라면 깨지고 터지더라도 화끈하게 부딪쳐보라. 여론조사를 쳐다만 보지 말고 그 결과를 바꿀 궁리도 해보라. 이기려면 지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설사 지더라도 잃을 것이 없는 게임 아닌가?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