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브리짓 존스 혹은 삼순이 같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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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히 작정하고 책을 펼쳤다. 불경 집어든 신학도의 심정이랄까. 여하튼 호기심 반, 학구열 반이 발동한 독서였다. 미국 여성작가 샤론 크럼의 장편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노블마인)는, 투철한 목적의식에서 시작된 독서였다.

이 모든 소란은 '칙릿'(Chick-lit) 열풍에서 비롯됐다. 젊은 여성(Chick) 독자를 노린 소설(lit.literature)로, 말하자면 로맨스 소설의 신 버전이다. 로맨스 소설이 매우 여성적인 여성이 낭만적인 사랑을 얻는 얘기라면, 칙릿의 장르 문법은 다소 중성적인 여성이 사회적 성공과 더불어 사랑마저 쟁취한다.

칙릿의 원조는 아마도 96년 영국에서 출간된 '브리짓 존스 다이어리'일 것이다. 브리짓의 일기장엔 다음과 같은 새해 결심이 열거된다. ▶엄마랑 싸우지 않는다▶비싼 속옷을 사지 않는다. 남자친구가 없으니 필요없는 짓이다▶경력을 쌓는다▶허벅지 살을 3인치 뺀다….

어딘가 낯익은 설정이다. 지난해의 '삼순이' 신드롬도 떠오르고, 서너 달새 20만 부 넘게 팔린 미국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한 달 전 출간된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도 유사상황이 발견된다.

제인도 장르 문법을 철저히 따른다. 대도시(뉴욕)의 전문직(지방검사보) 미혼여성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금발머리 깡똥하게 묶고, 검은 테 안경에 잠수부 시계를 차고 다닌다. 직장에선 인정받지만, 첫 데이트에서 남자가 남긴 스테이크 조각을 주워먹는 여성이다. 결말 역시 'And they lived happily ever'식이다.

제인이 종국에 선택하는 남자는 왕자님이 아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칙릿이 로맨스 소설보다 진화한 장르란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칙릿에선 ▶여성이 사랑을 기다리지 않고 쟁취하며▶꽃미남보다는 'Mr. Right'(바른 생활 사내)가 이상형이 된다. 적어도 신데렐라는 면한 것이다.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사랑을 쟁취하려면 여성적으로 개조해야만 하는 걸까. 60년대 할리우드 스타 '도리스 데이'를 따라하는 제인의 선택은 옳은 것일까. 스포츠 브라 벗어던지고, 가슴을 만들어준다는 브라에 휴지 몇 장 채워 입으면 진정한 여성이 되는 걸까. 명품 휘감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의문은 꼬리를 문다. '다정한 여인' 제인이 직장에서도 성공하는 건 또 무언가. 소설의 주장대로 외모를 바꾸면 인생도 바뀌는 걸까. 3인칭 소설인데도 출판사는 '~다이어리'라고 제목을 바꿨다. 칙릿의 원조는 그래도 1인칭이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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