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BOOK꿈나무] 딴지일보식 글 쓴 선비가 있었다는데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정조 시대 선비 이옥(1760~1815). 성균관 유생 시절 '불온하고 타락한 문체를 쓰는 자'로 몰려 반성문을 써야 했던 인사다. 불온과 타락? 공자왈 맹자왈 하던 엄숙한 정통문학을 거부하고 일상에 기반한 자유로운 문장을 구사했다는 것이 속사정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1970년대 쯤에 '딴지일보'식으로 글을 썼다고 해야 할까.

정조의 서슬 퍼런 '문체반정'에 걸려든 선비에게 내려진 처분은 가혹했다. 성균관 퇴학, 과거 응시 자격 박탈 등등. 게다가 임금한테 찍혔다고 소문이 나자 죽을 때까지 주변에 얼씬대는 사람도 없었다. 유일하게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친구가 그의 원고를 자신의 문집에 끼워 겨우 보존했다고 하니 참 기구했다.

이 책은 그런 이옥의 작품세계를 집약하는 12가지 이야기를 청소년 눈높이에 맞게 풀어쓴 것. 초상집 곡소리를 들으면서 계면조냐 평우조냐 곡조 분석을 하는 송귀뚜라미, 관청 재산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 배포 큰 창고지기 장복선, 기생이든 스님이든 닥치는 대로 속여먹지만 미워하기 힘든 사기꾼 이홍, 과거 시험을 대리로 쳐주고 돈을 벌었던 류광억 등 하나같이 재미난 면면의 사람 얘기가 릴레이처럼 이어진다. 호랑이를 길들인 며느리나 호랑이를 잡은 아낙네 등 어디서 들어본 듯한 옛이야기도 슬쩍 끼어들고, '족집게 각로 선생'처럼 흰 머리 뽑는 족집게를 의인화한 독특한 스타일도 맛볼 수 있다.

시대가 용납하지 않았던 이옥의 재기발랄한 입담을 오늘날에 맞게 공들여 다듬은 책이다. 이옥이 일반적 용례를 벗어난 어휘와 표현을 즐겨 쓴 탓에 풀어쓰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고 한다. 고전문학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이들을 그 옛날 할머니 무릎 베고 이야기를 조르던 시절로 살살 꼬여내보면 어떨까. 분량은 많지 않지만 이야기마다 나름대로의 교훈을 담고 있어 녹록지 않은 읽을 거리다. 초등 고학년부터.

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