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꿈나무] 버려진 딸 옛이야기 … 시인이 다시 써 생생해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우리 옛이야기에서 페미니즘을 찾을 때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바리공주'다. '바리공주'의 바리데기는 남아선호사상에 짓밟혀 가혹한 운명을 맞았지만 꿋꿋함을 잃지 않고 스스로 해피엔딩을 만들어낸다.

'바리공주' 이야기의 서울 지역 전승본을 김승희(56) 시인이 어린이를 위해 새롭게 썼다. 여성성과 모성, 그 안에 담긴 원초적 힘에 늘 남다른 눈길을 거두지 않았던 시인과 '바리공주'의 짝짓기라는 '실험'이 흥미롭다. 시인은 아기자기하고 고운 동화의 전형적 거죽으로 바리데기 이야기를 포장하는 대신, 무가(巫歌) 형식을 그대로 살린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인다. 김승희식 '바리공주'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바리데기의 지난한 여정을 리얼하고 힘있게 전달하면서 '바리공주'를 각색한 기존 동화들과 뚜렷하게 선을 긋는다.

바리데기는 오구대왕의 일곱번째 딸. 태어나자마자 "또 딸이야?"하면서 버려진다. 대왕은 바리데기를 빨리 죽게 하려고 겨울에는 삼베 저고리에 삼베 바지, 여름에는 솜 저고리에 솜 바지를 입히라는 명령을 내린다. 허나 뱀한테 물려 죽으라고, 대나무에 찔려 죽으라고 빌고 또 빌었어도 바리데기는 끝끝내 살아난다. 가냘픈 소녀가 신선세계의 무장승을 만나 물 긷기 3년, 불 때기 3년. 그것도 부족해 무장승과 혼인해 일곱 아들을 낳는다. 그 대가로 약수와 꽃을 받아 자신을 버렸던 아비의 목숨을 구한다. 가장 구박했던 아이가 가장 큰 효를 실천한다는 역설이 이뤄진 것이다.

글을 받쳐주는 그림도 전래동화의 흔한 틀에서 상당히 비껴나 있다. 원색 위주의 화려한 색감, 페이지마다 다채롭고 대담한 화면 연출은 김 시인의 문장과 때론 충돌하고 때론 섞여들면서 '보는 즐거움'을 충분히 보장한다. 그림책과 관련해 늘 글이 먼저냐 그림이 먼저냐 얘기가 많지만 이 책만큼은 그 저울질이 쉽지 않다. 7세부터.

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