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여 혼혈인 “우리도 한국인 입니다”(마음의 문을 열자: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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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피부빛 달라 푸대접은 억울/불우이웃 성금조차 받아본적 없어
구랍29일저녁 TV의 「89 주부가요제」 생방송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대상을 받고 하염없이 눈물흘리는 흑인 혼혈주부 전윤희씨(38ㆍ동두천시 광암외인아파트)의 모습에 진한 감동과 함께 애틋함을 느껴야했다.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요/내겐 아물지않은 어두운 상처가 남아있었요….』
마치 자신의 지나온 반생을 얘기하는 듯한 열창에 청중들도 따라 울었다.
전씨는 수상의 벅찬 기쁨보다 참가신청을 받아주지 않을까 가슴졸이던 기억과 난생처음 받아본 「칭찬」의 박수소리에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쳤다고 말했다.
52년 인천에서 미흑인병사를 아버지로 태어난 그는 곧 귀국해버린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른채 홀어머니(63) 밑에서 자랐다.
『여고졸업때까지 온통 회색빛 추억뿐이에요. 인천 신흥국교 3년땐 놀림에 견디다 못해 혼혈아 학교인 부평 한일국교로 전학까지 했죠.』
꿈많은 사춘기를 온갖 냉대와 질시속에 절망과 슬픔으로 보낸 전씨는 78년 미8군 흑인중사 틴슬리씨(40)와 결혼,9세된 딸과 3세짜리 아들을 두고 있다.
『이젠 행복을 찾았어요. 남편 임기가 끝나는 93년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녀는 『꼭 복음성가 가수가 돼 모든 이를 차별없이 사랑하는 하느님을 노래하겠다』고 말한다.
전쟁이 남긴 이 땅의 시대적 비극을 평생안고 외로이 살아가야 하는 「혼혈인」.
뜨거운 심장과 욕망ㆍ능력을 똑같이 갖고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때문에 교육에서,취업에서,모든 사회활동에서 버림받는 춥고 배고픔 이웃이다.
백인혼혈인 혼혈인협회장 강필국씨(39ㆍ서울 한남동)는 87년6월항쟁때 을지로에서 시위학생들에게 『양놈 때려죽여라』는 고함과 함께 집단구타당해 앞니가 부러지고 피투성이가 돼 길바닥을 뒹군 서러운 경험을 갖고있다.
또 후배뻘인 흑인혼혈 심태마씨(33)가 지난해 여름 이태원에서 길가던 청년 2명이 다짜고짜 휘두른 칼에 옆구리를 찔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보름동안 입원하다 병원비가 없어 달아난 사실도 기억한다.
강씨는 『최근 젊은층의 반미감정때문인지 이유없이 폭행당하기 일쑤』라고 불안해 한다.
강씨는 난리통에 어머니마저 잃고 가난한 이모(69)부부아래서 막노동ㆍ공원ㆍ행상 등을 하며 성장,현재 엑스트라배우일을 하며 월 10만원짜리 단칸 사글셋방에서 부인(34)ㆍ세자녀와 함께 가난하게 살고있다.
사무실한칸없는 「혼혈인협회」회장직을 3년째 맡고 있다는 그는 국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아이들이 튀기라고 놀린다』며 울땐 목이 메어 당장 미국으로 「도망쳐」 살고 싶단다.
그러나 지난 연말부터 시작한 모금운동이 제대로 되면 오갈데 없는 혼혈인 2세 어린이들과 재소중인 11명을 돌봐주고 식을 못올린 동료들에게 합동결혼식을 열어줄 수 있다는 욕심(?) 때문에 울분을 삼킨다고 했다.
국내 혼혈인 수는 줄잡아 4천명선.
대부분 사회의 뒤안길에서 밑바닥생활을 하고있으며 이중 월수 5만원이하인 6백여명은 보사부와 펄벅재단(한국지회장 변창남ㆍ51)으로부터 매달 2만5천∼2만9천원씩 생계비 보조를 받고있으나 입에 풀칠조차 어려운 실정.
빈번한 「불우이웃돕기」 등 각종 사회성금도 이들에겐 돌아가는 일이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두렵기만 한 사회가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눈길을 주는 것이다.
이들은 입을모아 외친다.
『우리도 똑같은 한국인입니다.』<동두천=김석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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