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소니 손 들어준 소비자 파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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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TV의 히트로 7세대 패널 경쟁에서 S-LCD가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됐다. 사진은 보르도TV 제품전시회 모습.

이코노미스트LCD 업황이 바닥을 탈출했다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7세대 LCD 패널의 표준을 향한 업계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치열하다. 삼성전자와 소니의 합작사인 S-LCD는 지난달 세계 최초로 양산을 시작한 7세대 라인의 유리기판 사이즈를 1870×2200으로 설정하고, 40인치와 45인치를 주력으로 밀며 공격에 나섰다.

반면 LG필립스LCD(LPL)는 내년에 본격 양산을 시작할 7세대 라인의 사이즈를 1950×2250으로 잡고, 42인치와 47인치를 주력으로 역공에 나설 계획이다. 여기에다 최근 대만의 주요 LCD 패널 제조업체들이 7.5세대 투자를 발표하면서 LG필립스LCD의 7세대와 동일한 사이즈를 채택함으로써 LG필립스LCD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난해 5월 한 언론의 LCD 표준전쟁 관련 기사다. 불과 1년여 전만 해도 7세대 LCD 패널 싸움에서 LPL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32, 37인치 패널 생산에 적합한 6세대에 이어 7세대는 각각 5인치씩 늘어난 42, 47인치로 표준을 주도할 수 있다고 봤다.

LPL이 유리했던 이유는 AU옵트로닉스, 청화픽처튜브(CPT) 등 대만업체와 샤프, 히타치, 마쓰시타, 도시바 등 일본 LCD업체 3사의 합작법인(PS 알파 테크놀로지)까지도 6세대 라인을 가동했기 때문이다. 6세대를 생산하고 나면 7세대는 자연스럽게 42인치, 47인치로 넘어간다.

반면 5, 6세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7세대로 뛰어든 삼성-소니는 기존의 표준 규격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7세대 라인을 가동했다. S-LCD가 40인치와 46인치에 적합한 7세대 패널을 생산한 것은 40인치로 37인치와 42인치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전략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전문가들이나 시장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37-42-47로 이어지는 LPL의 표준 규격이 대세를 이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리하게만 보였던 표준 경쟁에서 최근 삼성-소니 진영이 극적으로 부활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삼성과 소니 LCD TV의 선전 덕분. 올 상반기 국내 가전제품 중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꼽히는 삼성전자의 보르도 TV와 트리니트론의 소니 명성을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브라비아 덕에 S-LCD는 불리하기만 했던 표준 전쟁에서도 전세를 역전시키고 있다.

애초 6세대 없이 출발한 S-LCD는 기존 업체의 6세대 표준인 37인치와 7세대 표준인 42인치를 한꺼번에 잡기 위해 40인치를 중심으로 한 7세대 표준을 택했다.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7세대 표준을 40-46인치로 잡을 당시 논란이 많았다. 기존 업체들이 이미 37-42-47인치 라인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37인치를 포기하더라도 42-47인치로 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특히 기존 TV세트 업체들이 32-37인치의 패널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40인치를 만들 경우 판로가 있느냐가 가장 문제였다.

LG 등 선발업체들은 차세대 표준을 42인치로 잡고 있었다. 자칫 40인치를 만들었다가 세트업체들이 외면해 판로가 막힐 수도 있었다. 다행히 소니와 의기투합하면서 삼성전자는 과감하게 40인치로 방향을 잡았다. 결정난 후에도 내부에서 계속 반대 의견이 나올 정도로 불확실성이 컸다.

하지만 S-LCD의 주요 수요자인 소니와 삼성이 전 세계 LCD TV시장에서 1, 2위를 차지하면서 선전하자 S-LCD의 7세대 패널 표준인 40인치와 46인치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삼성과 소니는 TV세트 제품 선전으로 패널 공급이 부족해지자 지난달 31일부터 대만업체에서도 LCD TV용 패널을 공급받기로 했다.

LPL은 재고 쌓여 고전

세계 3위 LCD패널 공급업체인 AU옵트로닉스(AUO)도 LPL과 같은 크기의 패널을 생산했다. AUO가 42인치 8장을 생산할 수 있는 라인을 깔고도 40인치를 생산키로 한 것은 그만큼 40인치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번 계약으로 대만 업체가 42인치 패널 생산을 포기했다고 보기엔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조치는 대만 업체가 다양한 크기의 패널 공급을 시도하는 것으로 봐야지 7세대 규격을 40인치로 돌렸다고 보기에는 성급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소니와 삼성의 제품이 계속 세계 시장을 주도한다면 42인치 패널 생산 업체 중 몇몇 업체는 40인치 생산으로 방향을 바꿀 가능성도 있다.

▶LG필립스LCD 파주공장 전경.

디스플레이뱅크의 박진한 연구원은 “애초 6세대에 먼저 투자한 LG를 잡기 위해 삼성과 소니가 40-46인치라는 7세대 표준을 들고 나왔을 때만 해도 모험이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다”면서 “하지만 삼성과 소니가 브랜드 파워와 마케팅력을 바탕으로 TV세트 제품에서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현재 시점에서는 40인치가 7세대 패널의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 초 출시한 삼성전자의 보르도 TV는 6월 말 기준으로 60만 대가 팔린 것으로 집계됐다. 이런 속도라면 9월까지는 100만 대, 올 연말까지는 200만 대가 팔릴 것으로 삼성전자는 예측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보르도 돌풍으로 78년 미국에 TV를 수출한 후 29년 만에 처음으로 미 디지털TV 시장에서 판매량과 매출액 모두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또한 구매 패턴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영국·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 지역에서도 보르도를 앞세워 시장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유럽 전체 시장(18개국 대상)에서 시장점유율 20%를 돌파해 삼성전자 LCD TV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 생존 열쇠는 소비자 손에”

최근에는 동남아 지역에서도 1위를 차지함으로써 입지를 확대하고 있다. GfK 등 시장조사 기관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싱가포르·호주·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베트남·필리핀 등 7개국에서 LCD TV 1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 LCD TV는 6월 기준으로 싱가포르 22%, 태국 39%, 말레이시아 28%, 인도네시아 44%, 베트남 37%, 호주 22%, 필리핀 43%의 시장점유율로 동남아 주요 국가에서 LCD TV 1위를 차지했다. 소니도 지난해 9월 출시한 브라비아를 앞세워 전년 동기 대비 TV판매 대수 3.5배를 기록하며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삼성과 소니는 출발 당시 힘이 부족했지만 소비자들이 TV세트 제품에서 삼성과 소니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결국 표준 전쟁에서도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 셈이다. 비단 TV뿐 아니라 통신, 영상 등 각종 첨단기술 분야에서 표준 전쟁이 기업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서로 강력한 파트너를 구해 전략적 제휴를 하는 등 생존을 위한 게임을 계속하고 있다.

김경준 딜로이트 파트너는 “기업 생존의 열쇠는 소비자가 쥐고 있다. 기술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리 많은 우군이 있더라도 소비자가 선택한 제품을 기업이 선택할 수밖에 없다. 표준 전쟁도 업계의 전쟁이 아니라 소비자 확보전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 8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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