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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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하듯 저역시 제가 돌아갈 고향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말이에요.
사이, 피곤한 모습으로 방안에 들어서는 지연 한손에 병원에서 볼 수 있는 주사기 세트 (박스)를 들고 있다 태영을 바라보며
지연 또 술을 마시니.
태영 (쳐다보며) 한잔 하겠어?
지연 (대답없이 진열장 서랍을 연뒤 박스를 넣는다)
태영 이젠 술만봐도 지겹겠지 (야유하듯) 백의의 천사! 오! 온 인류와 우리집의 암흑을 구원할 마지막 천사!
지연 (무시하듯 대답이 없자)
태영 (돌아서는 지연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어. 그 여자 말이야! 누나 선배라는게 사실이야?
지연 (걸음을 멈춘다)
태영 사실인 모양이군!
노인 그게 무슨 말이냐?
지연 (천천히 머리를 들며) 탱영이 말이 맞아요…. 그 여잔 제 학교 선배예요. 하지만 제 선밴 아니에요. 졸업을 하고 한번도 그 여잘 만난적이 없으니까요.
태영 그럼 어떻게 아버지와 만나게 됐지?
지연 (차가운 시선으로 돌아보며) 나도 모르는 일이야.
태영 우습군(자조적인 웃음)그래! 어차피 세상이란 그리 넓은 것만은 아닐테니….
지연 (날카롭게)그 소린 누구한테 들었니?
태영 누나가 그렇게 놀라는걸 보니 신기하군. (몇 걸음 옮기며) 어제 그 여잘 만났어! 생각보다는 인사성이 있는 여자더군.
노인 어디서 말이냐?
태영 제가 연락을 했어요. 동물원에서 만났죠.
지연 그럼 어제 술을 마신게…? 술을 사겠다 그러더군.
지연 미쳤군!
노인 니 애비도 말이냐?
태영 아니오. 아버지는 만나지 않았어요. 그 여자도 아버지와 같이 만나는걸 꺼려 하더군요.
지연 뻔뻔한 계집애!
태영 누나에 대한 이야길 했지.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그 내면에 숨어 있길 바라는 따뜻한 사랑에 대해 말이야.
지연 (소리치며) 그만해 그런 얘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까.
태영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현실이잖아.
지연 그런 여자로 해서 우리집이 흔들리진 않아.
태영 하지만 바람을 불고 있지.
지연 어머니가 저러시는게 어제 오늘 일이니.
태영 왜 병원으로 보내지 않는 거지. 어머닌 이제 완전한 환자야.
지연 바보 같은 자식! 넌 엄마가 그런 곳에 가서 진짜 미친 사람들 하고 어울려 있는 것이 좋겠니.
태영 처음부터 아버지와 누나가 그런 고집만 부리지 않았어도 어머니가 저렇게까진 되지 않았어.
(점차 감정이 고조되어 간다)
지연 아버지와 날 원망하고 있구나.
(잠시 생각에 잠긴다)그만두자. 지금에 와서 그런 이야기가 무슨 필요 있겠니.
태영 뭘 두러워 하는거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아버지와 누나의 그 새디스트적인 몸짓엔 이젠 구역질이 나!
(사이, 뺨을 때리는 지연)
노인 그만들 해라!
태영 올라 가겠어. 어차피 난 이집 사람이 아닐테니까.
(이층으로 올라간다)
(사이)
노인 니 에미는 잠이 든 모양이구나?
지연 (힘없이) 조금 전에요!
노인 너무 오래 재우진 마라.
지연 …이젠, 더 이상 제힘으로도 어쩔 수가 없어요.
(사이)
노인 그 아이 말에 너무 신경쓰지 마라….
(잔 기침을 터뜨린다) 아직도 해는 지지 않았니?
지연 (커튼을 들춰 창밖을 바라본다) 바람이 불고 있어요.
노인 마른 바람일게다.이 도시에선 언제나 마른 바람이 불지….
지연 어쩌면 비가 올지도 모르겠어요.
노인 …사내들이란 모두 바람 같아서 한자리에 가만히 안주하지 못하는 법이다….
지연 (위로하듯)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실거에요. 그 여잔 아버질 따뜻하게 감싸줄만한 그런 여자가 못돼요. (사이를 두어) 궁금한게 있어요? 그 남자는 어떤 사람이었지요? …그 오랜 시간을 어머니 가슴속에 남아 있을만큼 두 사람이 사랑했나요.
노인 (긴 한숨을 내쉰다)…그런 모양이군요. 이미 오래전 일이다.
지연 (나직하게)국민학교 5학년 때였어요. 어머닐 미워하기 시작한게.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어머닌 까닭없이 술을 마신채 잠자는 태영일 붙잡고 우셨죠….
처음엔 그게 무얼 뜻하는지 몰라서 저도 따라 울었어요. 하지만 어느날 문득 그 남자의 죽음을 알고 나서부터 어머닐 미워하기 시작했어요….
아버지 이외에 또 다른 남자를 사랑했던 어머니를 용서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노인 니 에미가 술을 시작한게 바로 그때 부터였다. 지금도 기억이 나요. 아버지가 배를 타기 위해 집을 떠나시던 때가.
지연 전 그때 늘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했어요.
노인 니 에민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헤아리는 아이였지. 하지만 여자로서는 그러질 못했다. 늘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어하는 니 애빌 붙드는 법을 알지 못했으니까…. 니 애비가 돌아오지 않는건 어쩜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연 아버지는 그때 배를 타지 못하셨어요.
…한동안 서해안 어느 섬에 계셨죠. 그러다 또 한동안은 강원도 어느 탄광에서 일을 하며 일년을 떠 돌았어요.
노인 모든게 니 에미의 잘못이었다.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엔 니 에미의 잘못이 너무컸어….
노인 그 아일 미워하지 마라. 어차피 세상이 다 안다면 더 이상 뭘 숨기겠니….
지연 (위로하듯) 그 아인 이제 어른이에요. 모든걸 자기스스로 해결해 나갈 나이가 됐어요. (분위기를 바꾸듯 커튼을 닫으며) 주무세요. 주사를 놔 드릴께요….
주무시고 나면 한결 기분 좋아지실 거예요.
노인 해가 지면 깨워주겠니? (걸음을 옮기며) 그렇게 할께요.
지연 (서랍에서 주사기를 꺼내 노인의 팔에 놓는다)
노인 …후회하고 있다…그때 널 그 청년을 따라 보냈어야하는 건데.
지연 (조용히 노인의 걷어 올린팔을 내려주며) 전 아무데도 가지 않아요.
노인 (서서히 잠이 들기 시작한다) 모든게 부처님 뜻이겠지…집안에 우환이 들었다면 그 역시 받고 살아야 할 업일테니 말이다….
(사이)
노인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겨 소파에 앉는 지연, 주사기를 탁자위에 올려놓은 뒤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흔들릴 때 마다 조금씌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방안에 촉촉히 스며드는 빗소리…. (긴사이)
어둠을 깨듯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
지연, 벽시계를 바라보며 일어나 문으로 다가가 벽면의 스위치를 올린다.
다시 밝아지는 무대. 그녀 문밖으로 나간다.
잠시후 지연을 따라 들어서는 30대초반의 남자.
비를 맞은듯 물기가 묻어 있다.
남자 많이 기다렸죠?
지연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조금전에야 다시 잠이 드셨어요. (남자의 비맞은 모습을 확인한듯 옷걸이의 수건을 걷어오며) 밖에 비가 내리는 모양이군요?
남자 안개비예요. 이런 날씨에 비가 내리는건 오랜만이죠. 그래서 안개비라 부르지만 말이오.
지연 (수건을 건네며) 몸이 많이 젖으신 것 같아요. 이걸로 대충 물기라도 털어 내세요.
남자 골목까지 택시를 타고 들어 왔어요.
(수건을 받아 머리를 닦아낸다)
지연 차를 한잔 끓여 드릴께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남자 고맙소! 차를 한잔 마시면 몸이 풀려질 것 같군. (사이,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 남자 물기를 닦고 수건과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건뒤 천천히 방안을 둘러본다. 사이, 찻잔을 들고 나오는 지연)
지연 못오시는줄 알고 나가볼까 하던 참이었어요. (탁자위에 잔을 내러놓고 않는다)
남자 (마주 앉으며) 그렇지 않아도 못 올뻔 했소. 강을 건너다 앞서 달리던 차가 교각을 들이 받았으니까. (잔을 들어 마신다)
지연 큰일 날뻔 하셨군요. (남자가 차를 마시길 기다린다) 사람들은?
남자 다행히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었어요.
지연 다행이군요.
남자 그래요. 이런 날씨엔 아무리 운전을 잘하려고 해도 안개 때문에 앞을 가늠할 수가 없으니까… (노인을 바라본다) 할아버지는 잠이드신 모양이군요?
지연 (남자의 시선을 따라 노인을 바라보며) 밤에는 통 주무시지 못하는 것 같아요. (우울하게) 특히 오늘같은 날씨엔 더 하시죠. 하루종일 해가 뜨길 바라시다가 이내 잠이 드셨어요.
남자 오늘은 안개 때문에 아무도 해를 볼 수 없었어요.
지연 알고 계세요. 그냥 습관적으로 물으시는 것 뿐이에요. (쓸쓸하게) 할아버지에게 그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희망이니까요….
남자 나이가 드셔서 더 그러실지도 모르죠… 어머님은?… 내 생각에는 더 이상 놔두시는 것은 무리예요. 이제 히포콘드라에 정신분열 증세까지 보이고 있어요.…순간적인 감정의 변화가 자살을 유도할 수도 있는 병입니다.
지연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하지만 그런 곳으로 어머닐 보낼 수는 없어요. 아무도 어머닐 이해하지 못할테니까요….
남자 (사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며) 할 수 없군요. 부탁한 것 바로 이거예요…. 더 이상은 구할 수가 없었소.
지연 (한동안 봉투를 바라보다 집어든다)
남자 많은 양은 아니에요…한가지 나하고 약속할 것은 이게 마지막이라는 겁니다. 아시겠지만 이건 의약법으로도 불법이죠. (지연 남자의 시선을 피하듯 머리를 숙인다)
남자 (일어나며) 난 이만 돌아가야 겠어요. 가족들과 의논해서 내 말대로 따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집어든다)
지연 (따라 일어나며)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남자 그런말은 할 필요가 없소. 죽은 영근이를 위해서라도 이정도는… 미안하오. 내가 괜한 말을 꺼낸 모양이군.
지연 아니에요…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들춰보며) 아직도 비가 내릴지 모르겠어요.
남자 지독한 안개비요.
그럼 이만. (남자 퇴장한다)
사이, 한동안 의자에 앉아 봉투를 바라보던 지연, 결심을 한듯 봉투를 주더니 속에 넣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간다.
(사이) 조심스럽게 한쪽 출입구에 모습을 드러내는 40대후반의 여인.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듯 한동안 출입구에 몸을 숨기며 방안의 동정을 엿본다.
(사이) 한동안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이 이내 어느 한곳에 고정되기 시작하며 이내 괴로운 몸짓을 참지 못하듯 진열장 앞으로 달려들어 술병을 꺼내 미친 듯이 마시기 시작한다.
(사이) 여행용 가방을 들고 소리 없이 계단을 내러서던 태영, 애처로운 표정으로 여인의 행동을 지켜본다.
한동안 그렇게 술을 마시던 여인, 술병을 든채 무너지듯 주저 앉는다.
태영 (여인에게 다가서 술병을 뺏으며) 이제 그만하세요. 어머니 몸엔 술은 해로워요.
여인 (힘없이 술병을 뺏기며)모두들 그렇게 얘기하지. (안타까운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며)하지만 너만은 그러지 않겠지. 너만은 나를 미워하거나 미친사람 취급하지 않겠지. (애원하듯) 그렇다고 이 에미에게 말해주지 않겠니.
태영 아무도 어머닐 미워하지 않아요.
여인 고맙구나. 넌 어러서부터 이 에미를 이해해 주는 착한 아이였지. (힘없이 시선을 떨어뜨린다)
태영 주무시는줄 알았어요.(아들을 바라본다)
여인 누난 유능한 간호원이에요.
여인 그 아인 언제나 나를 재워주지. (꿈을 꾸듯) 아주 편안하게…, 그래 아주 편안하게 말이다.

<20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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