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제40기KT배왕위전 : 이영구, 꿈에서 깨어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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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제40기KT배왕위전'

<도전 5번기 제3국>
○ .왕 위 이창호 9단 ● . 도전자 이영구 5단

제5보(54~63)=바둑은 상대로 하여금 쓸데없는 곳에 두도록 하고 나는 가치 있는 곳을 두면 이긴다. 지극히 단순한 이치지만 고수들의 경우, 돌의 효율을 극단으로 추구하다 보면 가끔 머리가 이상해지는 수가 있다. 본론에서 한참 벗어난 전보의 흑?가 바로 그런 케이스다.

흑▲는 보통 때라면 대개 선수가 된다. 그래서 이영구 5단은 중앙 쪽을 어떻게 둘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무심코 이곳에 두었다. 하지만 이창호 9단이 손을 빼 54를 두자 이영구는 꿈에서 깨어난 듯 화들짝 놀란다. 54는 가치 있는 수다. 이 수의 두터움이 상변 흑진의 값을 소리 없이 깎아내리고 있다.

또한 54는 흑A의 연결을 강요하고 있다. 한 집도 생기지 않는 무가치한 수를 두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어서 흑은 55부터 몸을 비비며 안에서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 사이 하변 백집이 공짜로 굳어지고 있다. 선수도 잡을 가망이 없어 보인다. 흑▲ 한 수 때문에 유망하던 형세가 자꾸 꼬이고 있다.

'참고도' 흑1로 그냥 한 칸 뛰어야 했다. 형세가 좋을 때는 평범한 수가 좋은 수가 된다. 이때도 백2로 둔다면 흑은 3으로 한 번 더 뛰어든다. 실전과 비교할 때 천양지차다. 백이 2 대신 3에 두어 하변을 지킨다면 그때는 흑이 귀중한 선수를 잡아 최대의 요소인 B를 차지하게 된다. 어느 쪽이든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흑▲가 이 모든 것을 비틀어버렸다. 이영구도 "왜 두었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너무 정성을 다하다가 사고의 진공상태를 빚은 것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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