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건영 『아버지의 축제』송영『멀리 있는 땅』등|그동안의「서투른」리열리즘에 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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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한 작품을 바라볼 때 다음 세 가지 범주를 자주 생각한다. 완성에 이른 작품유형, 독창적인 작품유형, 선비적 가치를 지닌 유형이 그것. 완성에 이른 작품유형이란 무엇인가. 그 작품이 속하고있는 장르의 정의에 정확하게 들어맞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 독창적이란 무엇인가. 필치가 고르지 못하고 때로는 질서 없고 저돌적이지만 괴물과 같은 것 속에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빛과 열을 내뿜는 작품이 그것.
신비적 가치의 작품이란 무엇인가. 우리들 자신 속의 심연을 우리로 하여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러니까 윤리적 철학적 혹은 미학적인 것 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겨냥한 그러한 작품이 그것.
이 세 가지 유형에 대한 특별한 인식을 요구하는 시대의 초입에 우리가 혹시 서있는 것이 아닐까. 말을 바꾸면 90년대스런 징후군이 이런 점검을 새삼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정건영씨의「아버지의 축제」(『한국문학』12월호)만큼 완성에 이른 작품 유형이란 흔치 않을 것. 이를 두고 막바로 고수의 솜씨라 하면 작가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문맥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의 유형을 간략히 설명할 방도는 없지만 분단문제를 다룬 작품으로서의 완성도에 이른 것이라 규정할 수는 있다.
전상국·이상문·조정래·유재용·박완서·선우휘, 또 한 분의 원로작가 등 등 50년대에서 60, 70, 80년대, 그러니까 분단 40여년에 걸친 우리문학의 중심부로서의 앓고 있었던 주제군이 거의 평균적 수준에서 소화되어 있음을 보는 일은 어떤 점에서는 감동적이라 할만하다.
곧 분단문제의 그 동안의 소설적 처리를 높은 수준에서 골고루 흡수하면서도 그 나름의 견고성을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월북한 아비가 재취한 것, 새 가정을 꾸린 것, 그것을 본 아들의 이해수준이란 결코 관념적이 아님을 보여줌에서도 이 작품은 규범적이다. 아들인 작중 화자의 바람기(실감)를 동반함으로써 비로소 이 작품은 규범성을 획득하는 것. 나는 이를두고 남의 대리감정을 기술하는 서투른, 혹은 자동화된 그 동안의 리얼리즘 수준의 작가들에 대한 조금의 비판을 하고있는 것이다.
남의 대리감정을 서술하는 일이 작가의 임무일까. 그것이 진짜 리얼리즘일까. 그렇지만 80년대까지 그것의 소중함이 인정되었음도 사실이 아닌가. 이런 강렬한 반론을 나는 물론 승인한다. 아직도 그 유효성이 주장됨도 어느 수준에서 승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강한 비판세력을 하나의 징후로 떠올리는 세력에 편들고 싶다.
그 때문에 나는 교원 노조의 대리감정을 쓴 작품보다는, 또한 노동해방 운동의 대리감정 표시나 주장을 그린 작품보다는 서해성씨의「살아오는 새벽」(『실천문학』겨울호)을 기리고 싶다. 자기 이야기여야 하는 것. 자기의 기억에 의하여 쓴 것이 있어야 하는 것. 이를 두고 묘사라 하는 것. 문학이란 묘사가 아닐 것인가. 남의 대리감정 설명이란 점점 의미가 없는 시대로 접어드는 것이 아닐까. 자기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주제에 남의 이야기나 찾아다니며 변호사 노릇하는 것을 나는 계속「현실 침범형」이라 불러 경계 해 왔다.
그 때문에 송영씨의「멀리 있는 방」(『현대소설』겨울호)을 나는 좋아한다.
그 작품에다 「자전적 사소설」이라 규정하여 표기한 편집자의 견해에는 조금의 저항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르포의 시대, 거침없이 현실이 소설을 침범하던 시대에서 소설을 방어하는 일.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며, 어떤 수준의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갈 알지 못하나 이 과제를 외면하고도 문학이 풍요로워질까. 김윤식(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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