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걸 교수의 공공 디자인 산책 ⑧ 안 띄는 큰 글자, 잘 띄는 작은 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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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속도제한 표지는 도로의 성격과 공간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주(支柱) 사인의 형태로 도로 옆에 설치되거나 노면에 직접 그려지기도 합니다. 도로 상황에 따라 적합한 표시 방식을 따르지만, 늘 앞을 바라봐야 하는 운전자들에게는 운전 도중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오는 노면표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지 제작에도 '조화와 대비'와 같은 디자인 원리가 적용됩니다.

우리의 경우 지역마다 통일되지 않은 크기와 형태의 숫자를 노면표지에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쉽게 읽힐 수 있느냐는 '가독성(可讀性)' 또한 천차만별입니다.

시속 30㎞ 이하로 주행할 것을 지시하는 표지를 비교해 봤습니다. 우리나라는 '30'이라는 숫자가 도로 방향을 따라 직선 차선에 맞춰 상하좌우로 평행한 획이 강조돼 있습니다. 원 또는 변형된 원 속에 비교적 꽉 찬 모습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속도제한 표지는 비슷해 보이지만 디자인의 관점에서 보면 꽤 다릅니다. 주행 방향으로 다소 길게 원근법적으로 그려진 타원은 평행한 차선에 맞춘 것이 아니라 직선에 맞서는 곡선을 대비시킨 방식입니다.

표지가 벗겨지거나 노면이 오염될 경우에 대비해 '3'자의 디자인에서도 '8'자와의 혼동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배제했습니다.

크기를 보면 우리 표지는 도로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영국의 표지는 여유를 둬 배경과 대비되는 효과를 얻어내고 있습니다.

'동일한 조건 아래서는 큰 글자가 잘 읽혀질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이 아닙니다. 영국의 표지는 '대비'된 디자인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며 전달에도 효율적이라는 것을 이해한 결과입니다.

권영걸 한국공공디자인학회 회장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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