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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없는 영혼' 작가 공지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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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펴냈다 하면 베스트셀러! 공지영 신드롬! 가히 2006년 출판계의 키워드다. 다른 소설가의 작품이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기에, 실용서가 아니면 팔리지 않는 척박한 출판 현실에서 왜 '공지영'일까?

1. 공지영은 "한국의 결혼제도는 불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할 사안"이라며 목소리를 한 톤 높였다. "특히 일하는 여성에게 쏟아지는 가사부담, 또 시댁문제는 어떻고요? 끔찍할 정도죠."

2. "남성중심사회가 고정화한 '착한 여자'라는 이미지를 부정하고 도달한 것은 괴테의 말처럼 세상과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의 본질, 바로 여성의 생명성,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었어요."

3. 공지영은 "사람을 두 종류로 분류한다면 아이를 낳아본 사람과 안 낳아 본 사람으로 나누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세상을 보는 모든 가치관이 변화하기 때문"이란다.

4.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수들을 만나는 동안 석 달 내내 울었더니 나중에는 사형수들이 "언제까지 우나 보자"며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참여정부에서 사형제가 빨리 폐지돼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말했다.

사랑하고, 상처입고, 미워하고, 용서하면서 또 다시 사랑하고…. 올 초 공지영은 마흔 네 개의 촛불을 꽂았다. "돌이켜보면 나를 배반하지 않은 것은 오직 글뿐이었다"는 공지영-.

어느 새 작가경력 20년이 다 돼 가는 그를 만나기 위해 먼지 쌓인 <무소의 뿔처럼…><고등어>부터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까지 10여 권을 읽어내렸다. 그뿐인가. 단행본 몇 권 분량은 돼 보이는 관련 기사들, 몇몇 지인의 '증언'을 쑤셔넣고 나니 머릿속이 복잡하다. 아니, 그보다 걱정이 앞섰다.

인간 공지영은 쉬 상처받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평생 아픈 사람이다. 괜스레 잘 아물고 있는 상처를 헤집는 것은 아닐까? 활자로 인해 또 다른 생채기가 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열심히 마음 주다 상처받는 거, 그거 창피한 거 아니????냐???. 정말로 진심을 다하는 사람은 상처도 많이 받지만 극복도 잘하는 법이야."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중에서)

그래, 진심으로 만나자. 큰 숨을 한 번 쉬어 본다. 산자락에 고즈넉이 자리한 삼청각 한정식집 <이궁>에서 그를 기다렸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광이 세상사 복잡한 일을 다 잊게 만든다. 공지영은 약속시간보다 5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 몰랐다"며 땀을 닦는 그는 조금 지쳐 보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하구나. 커다란 리본 벨트가 돋보이는 연분홍 원피스, 반짝거리는 하얀 슬리퍼, 그리고 작은 귓불 밑에서 달랑거리는 귀걸이가 불혹의 나이를 무시하는 듯했다.

"저 혹시… 여기서 담배 못 피워요?"

그가 가방을 뒤지며 담배를 꺼내드는데, 알고 보니 레스토랑 내에서는 금연이다.

서른둘, 생의 막다른 길에서…

"할 수 없죠, 뭐. 여기 그럼 스파클링 워터 있어요? 탄산 들어간 물…. 없으면 아이스커피에 설탕.프림 넣지 말고 주세요."

옆머리를 양쪽 귀 뒤로 넘기는 그의 팔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얼마 전 시골집(강원도 평창)에 갔다 술을 마시고 넘어졌다 했다. '철퍽' 소리가 날 정도로 심하게 부딪혔는데 졸려서 그냥 잤단다. 기자 또한 유사한 경험이 여러 번 있었기에 맞장구를 치며 한바탕 웃어젖혔다. 공씨 친구들 말에 따르면 "태어나서 한 일 중 최고로 잘한 짓이 '시골집'을 산 일"이란다.

독일에서 살면서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다 보니 집 집마다 정원에서 온 가족이 뛰놀며 바비큐를 해 먹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것이야말로 '인간답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 공씨는 독일에서 인터넷을 이 잡듯 뒤져 '그 집'을 구입했다고 한다. 당시 <봉순이 언니>가 '잘 팔리던' 때여서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돈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얼마나 벌었느냐"고 물었더니 "번화가에 웬만한 빌딩 하나 살 정도로 벌었더라"고 답했다. 그런데 "이제야 빚을 다 갚았다"고. 무슨 빚이 그렇게 많았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말할 수 없어요"라며 눈맞춤을 피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연다.

"제 집에서 사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에요. 사치했느냐고요? 저한테 돈 써본 적이 사실 없어요. 옷도 10만 원짜리 이상 사본 적 없고, 보석도 가져본 적 없고. '누가' 그 돈을 다 가지고 가버렸어요. 얼마 전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즐거울 수 없어요. 아이들 학비 걱정 때문에 밤잠 못 이뤘던 날이 많았는데 그 시간이 제 활동의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내가 돈을 이만큼 쌓아 놓고 있었으면 그렇게 열심히 취재하지는 않았을 거예요."(웃음)

1994년, 그러니까 그가 서른한 살 때다. 십 몇억 원의 돈이 공씨 통장으로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돈이 뭔지 몰랐던 때여서 10억 원에 대한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그것을 깨달은 것은 그 다음해 친구와 함께 제주도 신라호텔에 가서였다.

"커피를 마셨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얘, 이런 호텔은 하룻밤 자는 데 얼마니?' 그랬더니 '20만 ̄30만 원 정도 한다'고 그러더라고. '되게 비싸다. 여기서 언제 한 번 묵어 보나' 했더니 제 친구가 막 화를 내면서 '너 그 10억 원만 은행에 넣어 놨으면 1년 내내 여기 있을 수 있다'고 그러더라고요."(웃음)

순수한 건가, 순진한 건가, 바보 같은 건가? 듣는 사람 마음은 왠지 모르게 짠해 오는데 본인은 웃고 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목젖까지 보이면서.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에 44년을 꺼둘려서일까? 이제는 여러 시냇물이 한 군데 모이듯 편해 보인다. 거스르지 않고, 물 흘러가는 대로…, 그게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한 표정이다.

첫사랑과 결혼했고, 헤어지고 또 사랑했다. 서른을 갓 넘기고 나서 보니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채 생의 막다른 길에 서 있었다. 그의 친구가 한 말을 빌리자면 "그것이 벼랑인 줄 알면서도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날들이었다. 늘 보기에는 화려했지만 그 속에서 들끓던 고통들, 그 긴 긴 터널을 지나 공씨는 읊조린다.

"하느님, 이제 그만 쉴래요."

공씨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발길을 뚝 끊었던 성당에 가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거리에서, 노동현장에서, 여공들이 벌거벗겨진 채 온몸에 똥을 뒤집어쓰고, 노동자들이 제 몸에 불을 붙여 분신하고, 거리에서 친구들이 끌려가 고문당하는 시대에 사랑이라니!'

종교조차 사치였던 1980년대, 그 격동의 시절을 겪어낸 그가 다시 신의 품안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는-.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정말 목숨 바치는 것만 빼고 다 바쳤는데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 거예요.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합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더라고. 그때 제 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신앙심이 나온 거죠. '저를 좀 살려 주세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어요."

-그게(노력해도 안 되던 일이라는 것이) 마지막 결혼생활이었나요?

"그래요."

그는 이 대목에서 "한국의 결혼제도는 불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할 사안"이라며 목소리를 한 톤 높였다.

"특히 일하는 여성들에게 쏟아지는 가사부담, 또 시댁문제는 어떻고요? 끔찍할 정도죠.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어떤 분에 제게 '왜 페미니스트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말했죠. '저기요, 제가 남성작가면 이 정도 열심히 글 쓰고, 돈 벌면 마누라가 매일 맛난 밥 싸들고 작업실에 왔을 거예요'라고요. 여자가 잘나고 돈을 많이 벌수록 죄인이 되어야 하는 이 현실이 뭔가 싶었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가사 책임을 지는 것도 화가 났고요. 때로는 인격적 모독까지 참으면서 그 이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죠. 물론 제 인간적 약점도 많겠지만, 그것은 모든 인간이 가졌다고 봤을 때 이유는 하나! 내가 여자라는 것, 그리고 결혼했다는 것이더라고."

-결혼생활에서 가사 분담을 안 했던가요?

"나는 (가사분담을) 하고 싶었죠. 너-무 하고 싶었어요. 저는 (민주화)운동을 하고 또 좌파적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랑 결혼하면 당연히 평등하게 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살아보니….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나온 거예요. 너무 황당해서."

공지영의 소설들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후일담문학'이라고 이름 붙였던 1980년대 회고문학, 그리고 1990년대 문단의 페미니즘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흐름에 젖줄을 대고 있다. 그의 글들은 "적어도 교과서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는 것을 배운 세대"의 교과서적 지식과 현실의 괴리를 아프게 다룬다.

공씨는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시간들이었다"고 회상한다. "더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행복하게도 나는 그 이전까지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어쩌면 '독재자에게 핍박당하는 가련한 민중으로 살았다"고 말한다.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누군가가 끌려갔다는 소문이 들리고, 그러고 나면 젊은 친구의 장례식장으로 향해야만 했던 그들에게 남녀의 문제를 가른다는 것은 어쩌면 사치였는지도. 하지만 1990년대가 지나면서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허탈한 남자들은 거리의 시위 현장과 노동 현장에서 돌아와 비로소 그를 여자로 보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한 번도 가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성적 농담들이 모욕감으로 밀려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놀랍게도 우리는 서른이 다 돼서야 '여성으로서의 삶'에 부닥쳐본 것"이다.

그때 불현듯 그는 '우리 주변 이야기를 진지하게 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여성으로서 서로 닮은 상처들을 무서운 속도로 써내려 갔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그렇게 나온 글이다. 이후 <고등어><착한 여자><봉순이 언니>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을 글 안에 담아 왔다. 20년 세월의 강과 함께 공씨의 생각 또한 조금씩 변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등어>를 쓸 때까지만 해도 '착하다' '얌전하다' '부드럽다' 등의 여성 이미지는 남성이 만들어 강요한 '신화'이고, 그것은 의당 거부해야 할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로서, 여자로서 '굴곡'을 겪으면서 점차 '어머니'라는 여성성의 의미가 조금씩 구체적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남성중심사회가 고정화한 '착한 여자'라는 이미지를 부정하고 도달한 것은 괴테의 말처럼 세상과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의 본질, 바로 여성의 생명성,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었어요. 제가 말한 '착한 여자'는 바로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자립하는 여성상이죠."

'엄마' 공지영은…

공씨는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아이 셋 낳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두 종류로 분류한다면 아이를 낳아본 사람과 안 낳아 본 사람으로 나누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세상을 보는 모든 가치관이 변화하기 때문"이란다.

"생명에 대해 훨씬 진해져요. 전쟁터에서 다친 아이들,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볼 때 예전에는 '어머, 가슴 아파' 정도였거든요? 아이를 낳고 보니 가슴이 미어져요.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초음파로 심장 뛰는 소리를 듣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어떻게 내 안에 또 다른 생명이 있을까?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 봐야 하는데 '이 놈의' 사회가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여성들을 대우하기는커녕 힘들게만 하니 문제죠."

-그렇다 보니 저출산이 심각하죠. 그런데 뾰족한 수가 없잖아요?

"예전에 아이 낳고 기르면서 너무 힘들 때, 그리고 내 친구들이 멀쩡한 직장 그만두는 것을 보노라면 속상해서 여기에 대한 대안을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지금은 없어진 것으로 아는데, 군대 다녀온 남자에게 가산점을 주고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여자가 아이를 낳고 재취업할 때도 가산점을 주는 거예요. 사실 아이들이 0세부터 2세까지는 엄마가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제일 좋거든요."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자 공씨는 그 순간 소설가도, 페미니스트도 아닌 '엄마'의 모습이다.

-큰딸 윤녕이는 글을 참 잘 쓰던데요?

"그래요. 저도 놀랐어요. 저의 글 스타일과 많이 닮았어요. 성격도 완전 똑같죠. 헤어져 있다 10년 만에 만났는데 너무 똑 닮아 DNA는 정말 강하다고 생각했어요. 말투까지 똑같아요. 감수성의 체계도 비슷하고."

-엄마의 글을 많이 읽었나 보죠?

"아니래요. 책도 제가 만났을 때 줬어요. 그 전에는 아빠가 못 읽게 치워 버려서 못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아빠'는 저랑 많이 틀린 사람이라서…."

'아빠'는 <논리야 놀자><아홉 살 인생> 등으로 유명한 위기철 씨다.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나 대학 졸업과 함께 결혼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아빠로부터 뒤늦게 딸을 데려온 이유는 뭔가요?

"애가 열다섯 살 때 새엄마와 불화가 있었나 봐요. 많이 힘들어해서 뉴질랜드로 갔는데, 아빠랑 새엄마랑 그곳으로 살러 왔더래요. 그때 딸 아이가 저한테 요청해서 저가 데리고 왔어요. 한국에서 당분간은 할머니와 살도록 거처를 마련해 줬죠.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돌아온 지 2년 만에, 그러니까 지난해 '이제는 엄마랑 같이 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같이 산 지 1년이 좀 넘었네요. 그 전에는 집에 왔다갔다 했어요."

-그 과정이 꽤 힘들었겠네요?

"제가 힘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 아빠'와 새엄마가 더 힘들었을 거예요. 제가 <별들의 들판>에도 좀 썼는데, 당시 아이가 거의 망가져 있었어요. 저도 절망했죠. 그때부터 아이를 일으켰죠. 저는 그 애를 보는 순간 나와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다뤄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어요. 내가 나를 어떻게 다뤄 주면 편안해 하는지 제일 잘 아니까요. 그렇게 유도했고, 그게 잘 먹혔어요."

-어떤 방법이었는지 궁금한데요?

"딱 한가지예요. 마음속에 염원을 갖되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는 거죠. 절대로 강요하면 안 돼요. 강한 희망을 갖고 있으면서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면 그냥 따라와요. 그것은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한테 적용되는 것 같은데요?"

"일흔 살까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잖아요?(웃음)

"맞아요. 눈에 뻔히 보이는데. 우리 딸 같은 경우는 저보다 더 섬세하면서 기질도 좀 더 강해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저한테 교육을 의뢰하죠. 학교 선생님까지도. 저는 우리 아이한테 '이 정도'까지만 터치하고 나머지는 그냥 놔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럼에도 어쩔 때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요. 자식 키우다 보니 가장 어려운 것이 참는 것이더라고요. 저는 그거 남자한테는 별로 안 해봤고.(웃음) 자식한테는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네요. 못하는 것을 보면서 말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것이 제일 힘든 일 같아요."

-애들이 아빠 보고 싶어하지 않아요?

"보잖아요. 나머지 애들은 자주 봐요. 둘째만 아빠가 돌아가셔서 마음이 안 좋은가봐요. 그래서 제가 마음고생을 같이하고 있어요. 자기는 내색을 안 하는데, 다른 애들이 아빠 만나고 그러니까…."

그는 오는 12월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책을 펴낼 계획이다. 성이 다른 세 아이와 소설을 쓰는 엄마가 함께하는 가정의 모습-. 궁금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해가 잘 안 가요. 한 집에 살면서 성이 다르다는 사실을 계속 인식하고 사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무 생각 없어요."

-12월에 책 내려면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저는 집필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요. 왜냐하면 머릿속으로 70% 이상 다 쓰고 시작해요. 쓰다 한 번 멈추면 다시는 못 쓰는 것이 징크스예요.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또 중간에 들어가는 대사나 지문까지 얼추 둥글리지 않으면 시작 안 해요. 그러고 나면 두 달 정도 두문불출하죠. 가족 외에는 나를 건드리지도 못하게. 친한 친구들도 저를 아예 못 봐요. 저 자신도 어쩔 때는 '내가 애들 먹여살릴 절박함이 없었으면 이렇게 열심히 썼을까' 싶을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해요."

그는 "쓰기 전에는 항상 두렵고, 무섭고, 도망가고 싶다"고 했다. 작가 경력 20년이 다 돼 가는데도 백지 앞에 앉았을 때의 그 막막함은 여전하다.

-아이들끼리 사이는 좋은가요?

"너무 좋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우리 애들이 음울하고 소극적이고,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요.(웃음) 다들 나 닮아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에요."

아이 셋을 키우면서 사랑에 대한 생각도 구체화됐다. 그가 정의하는 사랑은 "기꺼이 희생하고 그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순간 기자의 입에서 "왜 부부관계에서는 희생하지 못했느냐"는 애꿎은 질문이 튀어나왔다.

"희생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기꺼운 희생이 안 되더라고. (희생한 것에 대해) 계속 의식하고, 그러다 보니 원망하고, 미워하고."

-이혼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뭐라고 그러시던가요?

"저희 부모님은 '네가 행복한 것이 주변 사람을 모두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세요. 제 인생에 굴곡이 있을 때 '남들이 뭐라고 하겠니'라는 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요. 그 대신에 '네가 얼마나 힘들겠니'라고 하시죠. 어머니 집안이 남대문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어서 굉장히 실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셨어요. 명분이나 남의 이목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아요."

-왜 자꾸 결혼이라는 '불구덩이'에 들어가려고 하나요?

"그것은 제가 보수적이어서 그래요.(웃음) 같이 자면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의외인데요?

"그래요? 저는 합리적인 사람이지 절대로 자유분방한 사람은 아녜요. 친구들이 만날 놀려요. 평생 신호등 한 번 어긴 적 없으니까요. 저는 결혼제도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봤어요.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장점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마지막에 시댁이라는 거대한 집단이 나의 인생에 개입되면서 깨달았죠. 아, 이것은 제도의 문제구나! 그럼에도 저는 배우자가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마저 무너져 버리니 어쩔 수 없었던 거죠."

그'섬'에 가고 싶다

-또다시 사랑하고 결혼할 것인가요?

"그럼요. 일흔 살까지 누군가를 사랑할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여유가 많아져요. 한 25년 남았잖아요?(웃음) 결혼도 마찬가지예요. '나 다시는 결혼 안 해' 그런 생각 왜 안 했겠어요? 그런데 그것 자체가 강박이더라고요. 연애도, 결혼도, 글도 모두 제 삶의 언저리에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나를 스쳐 지나간다면 내가 받아들여야죠."

공지영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토마스 만은 어떤 작가가 당대에 각광받는 것은 작가의 은밀한 운명이 시대의 운명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쩌면 내가 겪은 개인적 상처들도 시대와 맞닿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개인의 불운이나 불행으로 넘기지 않고 작가로서 승화시키려는 욕망 때문에 지금껏 글을 쓰는 것이다."

공지영은 '좋은 세상'을 꿈꿨던 소위 386 세대다. 대학시절에는 학생운동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정적이던 '동조파'였다. 대학 시절이 어떠했느냐는 질문에 "학교 안 가고 만날 술만 마셨다"며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저는 민중가요.판소리 이런 거 싫어하고, (학생)운동도 안 했고. 그런데 주변 친구들이 다 운동권이어서 공부는 좀 같이 했죠. 수업을 하도 안 들어갔더니 우리 학교(연세대) 영문과 120명 중 끝에서 세 번째였어요. 맨 꼴찌가 총여학생회장이, 꼴지에서 두 번째가 문과대 여학생회장, 그 다음이 저였는데 애들이 '너는 왜 공부 못하느냐'고 놀렸어요."(웃음)

학창시절 우연히 알게 된 카페 '섬'-. 아침마다 학교 가는 길에 그는 섬에 들렀다. 카페 주인인 '섬 언니'는 부스스한 눈으로 일어나 앉아 커피를 타 줬다. 아침부터 굴속 같은 카페에 앉아 있느라 그는 자주 수업을 빠졌다. 그때 그들은 자주 섬에 모여 운동가요를 불렀다. 1980년대 중반 다른 카페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낮이면 갯벌처럼 조용했던 그 카페에 밤이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거기서 시인들을 보았고 소설가를 만났고 사진작가와 건축가가 꼬부라져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몇 해 전 섬 언니의 죽음을 접하고 나서 공씨는 소설 <섬>을 썼다. 거기에는 "지금은 여성 장관이 된 젊은 판사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다. 공씨는 "저랑 강금실 씨랑 다섯 시만 되면 출석 도장을 찍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둘이 딱 보는 순간 '코드'가 안 맞다고 느꼈던 모양"이라며 "항상 가까운 반경 내에 있으면서도 친해지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분은 판사였고, 저는 완전 천방지축 애였는데 그분이 저한테 말을 거셨겠어요?"(웃음)

학교 수업은 잘 안 들었지만 책은 많이 읽었다. 당시 "재미없지만, 친구들에게 창피할까봐 읽었던 경제학.철학.사회과학 서적들이 지금까지도 세상을 바라보는 척도가 됐다"고.

졸업 후 '최소한 전두환 정권에 도움되는 일은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들어갔다. 거기서 채광석(1948~87.시인.문학평론가) 형한테 노동운동 안 한다고 '구박'을 엄청 받고 몇 달 만에 출판사로 옮겼다. 백기완 선생의 딸인 백원담 씨가 운영하던 화담출판사에서 교정 보는 일을 하다 "너무 지겨워" 나왔다. '슬슬 교수나 돼 볼까' 해서 들어갔던 대학원에서는 한 학기 만에 '정말 적성에 안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상황은 점점 나빠졌고, 그 괴로움은 커져만 갔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시대가 나를 원하는 곳으로 가자'고 해서 간 곳이 공장이에요."

구로공단의 한 전기부품공장에 위장취업한 그는 한 달 만에 '위장취업'한 것이 탄로나 쫓겨났다. 그때가 1987년이었다. 다음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구로구청에서 대통령선거 부정투표함 사건이 발생했고, 현장에 있었던 그는 동료들과 함께 연행됐다. 구치소에서 열흘 남짓 보낸 후 그는 노동운동가의 삶 대신 소설가의 길을 택했다.

"사형제 빨리 폐지됐으면"

구치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쓴 중편 <동 트는 새벽>이 199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실리면서 공지영은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공씨의 1980년대에 대한 태도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일정한 변화를 겪었다. 초기 작품에는 '혁명적 열정'을 그대로 받아 안고 쓴 느낌이라면, 그 후 차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공씨의 소설에는 여전히 가난한 서민에 대한 애정이라든가, 중산층의 허위의식에 대한 폭로,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 면면이 발견된다. 지난해 펴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여러 번 자살을 기도한 여자와 사형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았다"는 공씨. 그가 사형제에 대한 소설을 쓴 이유는 이랬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와 벌이 뭘까. 가장 큰 죄는 생명을 빼앗는 일이고, 벌은 생명을 빼앗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게 바로 사형제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소재로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한 10년쯤 전이에요."

-사형수들 만나니까 어떻던가요?

"그냥 사람이에요."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수들을 만나는 동안 석 달 내내 울었더니 나중에는 사형수들이 "언제까지 우나 보자"며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사형제가 빨리 폐지돼야 하는데 걱정"이라며 "진보정당 집권 10년 동안 이런 것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정말 역사의 단죄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죄 없는 사람들 줄줄이 죽인 연쇄살인범을 보면 사형제 폐지에 회의가 들기도 하는데요.

"그냥 격리해 놓으면 되죠. 어차피 사형제라는 것도 안전한 격리를 위한 것 아닌가요?"

-비용도 만만치는 않죠.

"내가 개인적으로라도 댈 거예요."

-많아지면 어떡하죠?

"설마 그렇게 많아지겠어요? 오히려 사형제를 폐지한 선진국가에서 범죄가 더 없어요."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사형제가 폐지됐기 때문에 범죄가 준 것일까, 범죄가 줄었기 때문에 사형제가 폐지된 것일까? 누가 정답을 알려주면 좋으련만….

'글쓰기'는 힘이다. 공지영의 글 한 줄, 말 한마디는 우리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 대중에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던 호주제 철폐 운동 또한 공지영의 글 한 편으로 급격하게 전환점을 맞이했다.

"성이 다른 아이들. 지금의 아빠와 아이는 법률상 그저 동거인 관계일 뿐, 한 가족이면서도 아이는 아빠 직장의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세금 공제 대상에서도 제외되는 현실…. 아이의 양육권자이자 친권자로 법원에서 승인받았음에도 아이의 여권 하나 만드는 일에도 호주인 전 남편의 동의가 필요한 대한민국…."

공씨는 자신의 아픈 부분을 드러내며 '말도 안 되는' 호주제 철폐를 주장했다. 그의 간절한 바람대로 호주제는 2008년부터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지게 됐다. 사형수를 소재로 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현재 이나영.강동원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 또한 사형제 폐지 논란에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지영은 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는다. 왜냐? "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세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라면 현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싫어도 그 당시 베스트셀러 다섯 권 정도는 꼭 사서 읽는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주부들 사이트에 들어가 '요즘 아줌마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남편의 바람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 이런 것도 봐요."(웃음)

"노무현씨의 당선 자체가 역사의 진보"

-정치문제에도 관심 있습니까?

"그럼요. 예전처럼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난 대선 대는 누구를 뽑았나요?

"노무현씨 찍었지. 2002년도죠? 독일에서 오자마자 그냥 노무현 씨 찍었죠. 너무나도 희망이었는데…."

-후회는 안 하세요?

"후회라뇨? 그래도 저는 이회창 씨가 당선된 것보다 역사가 반걸음은 앞섰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안정되면서 계급이 거의 정착화됐어요. 우리 세대까지가 자수성가할 수 있는 마지막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판.검사, 의사 돼서 시골 출신이 신분상승하는 것이 가능했잖아요? 지금은 그게 너무 힘들어요.

만약 경기고, 서울대 법대 나와 고시 패스하고 집안까지 좋은 사람이 대통령까지 된다면 이것은 계급 고착화의 '종결편'이 됐을 거예요. 노무현 씨는 고졸, 그것도 상고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에 희망을 줬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그 당시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엄청나게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솔직히 많은 것은 바라지도 않았어요. 누가 노무현 대통령보고 경제 발전시키라고 했나요? 2002년 당시 모토가 뭐였나요? '정의'였잖아요? 정의. 못난 사람도 대통령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에 확인시켜 줬으면 당선된 것으로 끝! 사실 잘했으면 더 좋았겠죠.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국민은 다들 죽겠다고 하잖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 살리라고 뽑은 대통령이 아니었잖아요? 1980년대에 우리가 생각했던 혁명이 실패한 이유로 '이 세상에 공짜가 없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고, 역사에는 공짜가 없는 것 같아요. 민주화도 되고 경제도 잘되면 다 좋은데, 그게 아니라면 하나씩 해나갔으면 좋겠어요.

사실 노태우.전두환이 얼마나 경제를 발전시켰는데요. 그럼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어느 정도 반동의 시기가 올 것 같아서 사형제도가 빨리 폐지돼야 하는데 걱정이에요. 그런 것은 참 잘 못했어요. 국보법.사형제.호주제.사학법 개정은 했지만. 그런 것들을 진보정당 집권 10년 동안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 단죄받아야 한다고 봐요. 경제는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의 몫이 아니라고 봐요. 그런 진보적인 법들을 자기 시대에 못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그것으로 비판받아야 한다고 봐요. 솔직히 자기가 경제에 대해 할 줄 아는 것이 없잖아요? 그러면 진보적 법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녜요?"

-386세대가 너무 권력화했다는 비판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런 말을 많이 하는데요. 386이 너무 많아요. 그 중 몇 명이 권력화됐다고 해서 모두 권력화됐다고 하는 거예요? 나, 권력화 안 됐잖아요?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문화권력'이 됐죠.

"그것은 우리 나이가 가져다준 것이고, 실제 권력화된 사람은 아주 소수예요. 저는 아직도 386이 이 사회의 건강한 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공지영은 "이것은 나 혼자만 예언하는 것"이라며 "제2의 386세대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이제 대학에 들어가는 07학번, 08학번부터 또 다른 세대가 나타날 거예요. 386세대의 첫 아이들이 대학에 막 들어가는 시기이거든요. 이 아이들은 요즘 젊은애들이랑 또 틀려요.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를 따라 시위 현장에 다녔고, 뉴스를 볼 때 엄마 아빠의 '코멘트'가 달랐던 세대예요. 우리 딸이 그래요. '내 친구 엄마랑 아빠는 데모하다, 아빠가 엄마 넘어진 거 일으켜줘서 결혼했대.'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촛불시위를 주도한 세대이기도 하죠. 곧 '386 제2탄'이 나올 것이라는 말이에요. 저는 여기에 또 다른 희망을 걸어요."

'386 제2탄'을 기다리며

-지난 지자체 재.보궐선거에서도 열린우리당이 참패했는데….

"그런데 재.보궐선거에서 여태까지 보수당이 안 이긴 적 있어요? 왜 호들갑인지 모르겠어. 재.보궐선거라는 것이 큰 이슈가 없는 한 원래 보수적인 층이 투표하러 가는 거 아녜요? 여태까지 우리나라 재.보궐선거에서 진보당이 이긴 적 있어요? 누가 집권하고 있든. 물론 열린우리당에서 '우리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이 말은 좋은 것 같아. 이제는 정치에 관심들이 없잖아요. 그게 참 문제는 문제인데…. 나도 지난 지자체 투표, 너무 하기 싫었는데, 하필이면 집 앞에 투표소가 있어서 애들 교육상 할 수 없이 투표했어요."(웃음)

-열린우리당 지지했나요?

"아뇨, 민노당 찍었어요. 나는 열린우리당 계통 찍은 것은 노무현이 처음이었어요. 그런 것 막 물어봐도 되나? 너무 프라이버시 침해다. 비밀투표인데."(웃음)

솔직히 대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공지영, 진짜 솔직하다. 그리고 착하다. 주어진 질문에는 자신이 아는 '정답'을 최대한 열심히 이야기한다. 정말 피하고 싶은 질문에는 "그것은 프라이버시여서 말할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하고. '범생이'라더니, 정말 그렇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노조로 흘러갔다.

-노조에 대해서도 요즘 말들이 많죠?

"저도 여기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잠시 침묵) 지금 운동권이 너무 많이 달라졌어요. 노조문제, 굉장히 심각하죠. 아까 이야기했지만 저는 어떤 이념 속에 제 자신을 넣으려고 하지 않아요. 때문에 기회가 되면 비판할 생각이에요."

-여기서 좀 해 주시죠.

"에이, 아직 제가 잘 모르는 데다…."

보쌈김치가 맛있다며 먹는데 정신을 파는 듯했던 그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묻는다.

"그래도 재벌의 횡포에 비할까요? 노조가 귀족화됐다고는 하지만 아직 재벌의 횡포에 비하면…. 솔직히 저도 그 사람들 월급.판공비 이야기 듣고 경악했어요. 소위 권력이라는 것이 시련이 없으면 그렇게 가는 것 같아요. 그러다 된서리 맞으면 좀 자정하는 듯했다가…."

-정치적으로 '진보주의자'인가요?

"아뇨. 저는 합리주의자라고 생각해요. 제가 무슨 진보를 위해 '설거지를 꼭 여자가 해야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녜요. '나도 하루종일 일하는데 왜 나만 설거지를 해야 하나'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거죠. 정치도 그런 것 같아요.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것 아닌가요? 그런데 합리적인 사람들일수록 대부분 진보적이죠. 왜냐하면 세상은 바뀌어 가는데 매일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니까요."

그는 최근 아이들과 함께 영화 <괴물>을 봤다. 어떻게 봤느냐고 물었더니 "무조건 재미있고, 웃기고, 약간 뻔했는데" 이런 생각을 했단다.

"봉준호 감독이 386세대구나. 마지막에 화염병을 던지는데, 저는 깜짝 놀랐어요. 가슴이 너무 뭉클해지는 거예요. 옛날 생각이 나서. 그런데 우리 애들이 그러는 거야. '엄마, 저게 뭐야? 왜 소주병에 뭘 넣어서 그래?' '저게 바로 화염병이야' 하는데, 순간 너무 좋았어요. 우리 아이들이 화염병을 몰라서. 알면 어떡해요? 비극 그 자체다, 그건. 우리 큰딸도 얼마 전에 '뭐 매운 거 있잖아' 하기에 '최루탄?' 그랬더니, 그렇대요. 이름도 몰라! 그래서 너무 기뻤어요."

"합리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진보적"

-'대책 없는 반미 영화'라는 비평도 있던데요?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반미라기보다 권력에 관한 이야기던데? 괴물이 미국이라면 그 괴물에 당하게 하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 그게 주류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우화적으로 잘 표현된 것 같았어요. 연기도 잘했고. 그런데 한 가지 불만이 있었어요.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는 장면이 너무 거슬리더라고. 그 영화, 칸에서 상도 받았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이 진짜 저러는 줄 알면 어떡해. 구질구질해 보이잖아."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나는 잘 모르는데 '훌륭한 분들'이 지키는 것이 좋다고 하니까 지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웃음) 예전에는 국가자본주의가 타파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국가가 기본적인 것을 지켜 줘야 한다고 알고 있어요. 예를 들면 전기…수도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이 민영화돼 외국 자본이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갑자기 단전.단수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실상 민영화가 좋은 게 아니라는 얘기죠. 국가가 자본주의의 폐해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파수꾼 역할을 해 줘야 맞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스크린쿼터제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한국영화가 이만큼 성장했다고 하는데, 성장한 것 하나쯤 있어도 되지 않나요? 잘 성장하고 있는데 왜 이제 와서 성숙해져야 한다고 해요? 성숙은 다른 데서도 할 거 엄청 많은데. 간통제.사형제 같은 거 잔뜩 갖다 놓고서는, 무슨 성숙은 성숙이야?"

세상 일에, 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무척이나 많은 그는 요즘 방송 진행자로 변신해 '외도'를 즐기고 있다. 기독교방송(CBS FM)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코너를 맡은 것이다. 출연자들에게 예의나 차리는 식의 입에 발린 말은 하지 않는다. 톡톡 튀는 질문은 출연자를 당황하게도 하지만, 이러한 '공지영식' 인터뷰는 늘 화젯거리다.

예를 들어 김근태 열린우리당 최고의원과의 인터뷰에서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느냐"고 직설적으로 묻고, "옳은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라는 대답에 즉각 "왜 혼자만 옳다고 생각하느냐"고 치받는 공씨. 영화배우 안성기 씨한테 "연애 몇 번 해 봤어요"라는 질문을 툭 던진다. 안씨가 부인과의 사랑 이야기로 피해 가려고(?) 하자 공씨는 "아뇨. 아내는 빼고요. 첫사랑과는 왜 헤어졌어요"라고 지체 없이 잡아당긴다. 이 밖에도 박범신.전무송.노회찬 씨 등 장르를 망라한 사람들이 그의 '손님'이 됐다. 초청 손님과 함께 웃다 울다 감정을 억누르지도 감추지도 못하는 사람, 그게 공지영이다.

순발력 있고 재치가 넘친다. 글만 잘 쓰는 줄 알았더니 말도 잘한다. 세 살 때부터 말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니. 참 많은 것을 가졌다는 느낌을 주는 '이 여자'가 하는 말-.

"참 많은 것을 다 주셨는데, 제가 원하는 것 딱 하나를 안 주셨어요. 저 글 쓰게 하려고…."(웃음)

지난해 말 펴낸 소설 <사랑한 후에 오는 것들>에서는 한국 여성과 일본 남성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그간 공지영의 소설 속 분신이었던, 1980년대를 온몸으로 견뎌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사회와 가정에 치여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도 아닌, 지금 우리 곁 어디선가 숨 쉬고 있을 젊은 남녀의 사랑을 그린 것이다. 공씨는 작가 후기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이제껏 내 문학이 등에 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던 짐을 조금 내려놓고 쉬었습니다. 다 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고 내 자신에게 말해 주었지요."

지난 5월에는 10년 만에 두 번째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를 출간했다. 사랑을 주제로 공씨 개인의 일상을 담담히 고백한 짧은 글을 모은 것이다. 그는 "내가 사랑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나에게 아픔만 주고 떠났다고 생각했다"며 그러나 이제 "상처받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고,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키스도 침대도 빵을 나누는 것도, 보내주는 것도 사랑임을 알았다"고….

공씨는 영화감독이었던 두 번째 남편이 이혼 후인 지난해 작고했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죽는다는데, 어쩌면 그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가 나를 모욕하고 그가 나를 버리고 가버렸던 날들만 떠오르다니. 저 자신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리고 그의 죽음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저의 진실이었습니다. 죽음조차 우리를 쉬운 용서의 길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것을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투쟁을 넘어 사랑으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너무 솔직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 "아녜요. 저 솔직, 아직 다 안 했어요"라며 정색한다.

"굉장히 정화해서 쓴 거예요. 모든 게 솔직할 필요는 없지만 저는 글을 쓸 때 정직하게 쓰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독자들의 공감대가 넓은가 봐요.

"그런데 사실 '들춰보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뭐 그렇게 감추고 할 것이 있나요?"

그 간의 소설에서 개인의 경험으로 추측되는 장면이 묘사되기는 했지만, 사생활을 글로 밝힌 적은 처음이다. 그냥 "내가 불운했다고 하면 그만일 수 있지만" 작가인 이상 개인의 상처를 시대의 보편적 아픔으로 승화시켜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보편적 아픔이란 폭력 앞에서의 속수무책, 구조적으로 당하게만 돼 있는 여성의 삶, 언제나 진심으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게 되는 현실 같은 것들이다.

"이제는 상처를 긍정적으로 승화시켜 운명을 수용하면서 삶을 긍정적으로 살고 싶은 강한 욕망이 생겨요. 예전에는 숨어 있는 단점을 찾아내서 예리하게 비판하는 것이 지성인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실제로 그게 필요했고요. 그런데 이제는 좋은 면을 많이 보려고 해요. 그게 나를 위해 좋더라고요."

-이기적인 이유네요.

"저는 모든 사람이 합리적으로 이기적이면 너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어요."

올해로 마흔네 번째 생일을 맞았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니, 바람 같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고, 아침에 피었다 져버리는 풀꽃처럼도 느껴졌다. 내가 태어났다는 열한 시께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성당에 앉아 있는 문득…. 나쁘지 않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

돌아보니 작가로서 후회되는 일은 없다. 삶에 비춰보니 "좀 더 빨리 이혼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더 먼 곳으로 휘휘 떠나야 했다고. 더 많은 곳을 여행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도 사막에 가서 1년, 스페인에 가서 1년, 한국에는 쉬러 6개월 정도 묶으면서 집필하고 싶단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하기에 잠시 미뤄뒀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단다. 또한 그러한 경험들이 부질없지 않았기에, 오늘날 하나의 벽돌처럼 나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하기에.

늙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지만 외모는 30대 중반에서 시간을 잊은 듯했다. 자신의 피부미용 비결에 대해서는 "술하고 담배하고 내일은 꼭 세수를 하고 잘 거라는 굳은 결심 정도가 아닐까 싶다"고 했다.

그는 "하루는 술 안 마시고 세수하고 나서 뭘 막 바르고 있었더니 우리 딸이 '엄마 피부 이제 망가지겠다'고 하더라고"라며 까르르 웃었다. 어찌나 확실하게 웃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지 않았다면 목젖이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잘 울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웃음도 많다.

술은 지난 20년간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잠이 안 와 혼자 마신 지는 15년이 됐다. "내가 있는 술자리를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술자리도 잦다.

"제가 술 마시고 '아우, 나 너무 졸려' 하면 그 술자리는 끝나요. 아주 유명한 말이에요. '아우, 나 너무 졸려.'(웃음)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기 때문에 잠이 오면 빨리 자거든요."

"기쁨조 역할을 잘하는" 그는 술이 적당히 취하면 음주가무 실력을 뽐낸다. 노래방 18번 곡은 혜은이의 <열정>-. 몇 년 전 <중앙일보>는 이 곡을 부르면 제일 어울릴 것 같은 사람으로 공지영을 꼽았다. 최근에 '업그레이드'한 곡은 백지영의 <사랑 안 해>인데, 이 노래를 부르려는 '젊은 여자애'들이 많아서 경쟁이 치열하다고.

요즘 들어 "육체의 무너짐에 대해 각오하려고 한다"는 그는 "늙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긍정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제 나이 70에는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에 예쁜 슈트를 입고 빨간 차를 꼭 타고 있을 거야.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는 할머니. 그러면서 꼭 연애를 하고 있을 거예요."(웃음)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상처"라고, 그리하여 "글이 상처를 치유한다"고 믿는 '그 여자'의 글로 매듭지을까 한다.

"나 열렬히 사랑하였고, 열렬하게 상처받았으며, 열렬하게 좌절하고, 열렬하게 슬퍼했다. 이 모든 것이 뜨겁고 열렬한 내 삶의 일부이므로."

임지은 월간중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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