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변신에 남편들 '당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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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서울 동작노인종합복지관에서 형옥순(65.(左))씨가 이애영(64)씨의 손을 잡고 함께 스포츠댄스를 배우고 있다. 최승식 기자

'젊은 60대 할머니들'은 왜 60세 즈음에 '독립'을 선언할까.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의 '터줏대감' 격인 임순나(69.용인시 죽전동)씨. 그는 6년 전 처음 문화센터 문을 두드렸다. 아들 내외의 분가로 손자와 떨어지면서 밀려오는 허무감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밖이란 걸 모르고 자식만 위해 살았기에 한동안 방황도 했어. 그런데 문득 '내가 할 임무를 다했으니 이제 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때부터 다닌 실버건강댄스와 노래교실은 임씨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거기서 사귄 10명의 또래 친구들과 함께 영화 보고, 여행도 다니면서 집에서 '탈출'한 것이다. 임씨는 "이제 우울증이라는 걸 모르고 산다"며 즐거워했다.

◆ '빈 둥지 증후군'탈피=박진심(61.여.서울 북아현동)씨는 지난해 유치원 다니는 손녀를 데리러 복지관에 왔다가 우연히 컴퓨터 기초반 모집공고를 보고 도전하게 됐다. "일하는 딸을 대신해 손녀를 돌보다 보니 내 생활이 전혀 없었어. 그런데 손녀가 학교 갈 때가 되니까 '나도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요즘은 손녀와 컴퓨터 쟁탈전을 벌이기도 한다는 박씨는 "최근에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려 30년 만에 고향친구를 만났다"며 즐거워했다.

김모(65.서울 홍제동)씨는 6일 실버미팅에 참가해 70대 남성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30년 전에 홀로 됐다는 김씨는 "그동안 일절 연애를 안 했는데 자식들 다 시집.장가 가고 나니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며 웃었다. 그는 "에어로빅과 헬스를 하긴 하지만 말벗이 될 친구가 필요하단 생각이 나서 나와 봤다"며 "이제 남은 인생을 외롭지 않게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최혜경(가족학) 교수는 "60세 즈음은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를 돌이켜 보며 인생의 중간평가를 하는 시기"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탐색의 기회 없이 주어진 틀 속에서만 생활해 온 여성들은 자녀들이 떠나가는 이 시기에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는 것이다. 또 노후준비를 통해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건강에서 자신 있는 60대가 많아진 것도 이들의 새 삶 찾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 남편은 당황, 자식은 환영=이 같은 젊은 할머니들의 변신에 대해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들은 당황스러워한다. "당신 어떤 친구들을 만나기에 180도 변한 거야◆ " 송숙자(69.서울 잠원동)씨는 몇 년 전 남편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늘 집에만 있던 송씨가 문화센터를 다닌 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영화도 보고 저녁도 밖에서 먹고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센터에 다니면서 삶의 활기가 생겼다"는 송씨의 말을 남편도 이제 이해하게 됐다.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 서경석 회장은 "60대 남자들은 직장을 그만두면서 역할이 점점 작아지지만 여성들은 오히려 잠재된 능력과 끼를 발견해 간다"며 "남성보다 여성 60대가 배우고 활동하는 데 더 적극적인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자녀들은 대체로 어머니의 변신을 환영한다. 박지원(37)씨는 "친정어머니가 지난해부터 컴퓨터를 배우시면서 e-메일을 주고받고 메신저도 하게 돼 대화가 잘 통하게 됐다"며 "집에서 무료하게 지내실 때보다 사이도 더 좋아진 것 같아 열심히 다니시라고 격려해 드린다"고 말했다.

최혜경 교수는 "젊은 할머니들이 자기 길을 찾는 것은 본인을 정신적.육체적으로 건강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녀에게도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부담감을 크게 덜어준다"며 "자연히 모든 세대가 건강해지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한애란 기자<aeyani@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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