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시와 돈벌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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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이웃에 살고있는 역사학자네 집에 개밥을 얻으러 다닌다. 그 집은 대문도 현관문도 쓱 밀기만 하면 열린다. 그날도 대문을 밀고 계단을 몇 개 올라서서 현관문을 쓱 밀고 들어섰다.
꽤 이른 아침인데 윗집 여자가 거기 있었다. 윗집에서도 개를 키운다. 개밥 챙기러 일찍도 왔다고 말하려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잠든 역사학자를 깨우고 있었다.
개밥을 얻는 일은 역사학자가 없어도 되는 일이어서 드나들 때마다 역사학자를 만나지는 않는다. 나는 한밤중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가끔 마을 속을 천천히 걸어다니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역사학자네 방에는 불이 환하다.
거의 해뜰 무렵까지 글을 읽고 쓰고, 배달된 조간신문을 훑고 나서야 잠들었다가 한낮에 깨어나는 생활습관을 가진 사람인데 그 여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어서 꼭 지금 봐야 한다고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오로지 공부만 하는 사람에게, 현실적인 힘과는 거리가 먼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힘을 빌리러 저 여자가 왔을까.
드디어 잠옷바람에 눈을 비비면서 역사학자가 나타났다. 잠옷이라도 반듯하게 챙겨 입은 건 놀라운 일이다. 어떤 때는 내복을 뒤집어 입은 채 전혀 자신의 겉모습엔 상관 않는 얼굴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거침없이 말하는 분이다. 그럴 때도 아무도 내복의 상표가 드러난 잔등이나 맨발이나 헝클어진 머리칼 속에 묻어있는 실밥 같은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다.
이 역사학자의 집에 버스를 몇 번씩이나 갈아타고 사방에서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학자보다 나이가 더 많고 유명한 소설가도 멀리서 공부하러 왔었다. 거의 전문가 수준의 사람들이 그의 강의를 들으러 이 산골로 몰려들었다. 요즘 들어 장기집필에 들어가서 가르치는 일을 쉬고있는 중이다.
아까의 윗집여자가 역사학자에게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내일 우리 아들 대학입시 원서마감인데 큰일났어요.』 『무슨 일입니까?』 역사학자가 말했다. 『우리 아들이 역사공부 하겠다는데 좀 말려주세요』
역사 공부하면 출세도 못하고 돈도 못 번다고 말 좀 해주세요. 좀 타일러 주세요.』 그 여자는 애걸하듯이 말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어쩌면 말을 들을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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