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실상 과장 없이 진실하게 포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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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시가 양산되고 있지만 감동을 주는 시는 찾기 어렵다. 문학지들을 메우고 있는 시들을 두루 읽어보아도 별달리 새로울 것이 없다. 우리 시단이 모종의 불감증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타성적으로 씌어지는 순수시, 이념으로 경직된 민중시, 기계적으로 조작되는 집체시, 그리고 해체를 위한 해체시, 이 모두가 삶의 실상을 생생하게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생각이다. 우리사회를 추진시켜 나갈 원동력은 진정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암중모색의 무질서 속에서 혼미를 거듭하는 것이 오늘의 우리 시가 처한 현실이다.
최승호와 시(『동서문학』과『현대시학』11월)들과 박세현의 시집『길 찾기』(문학과 비평사간)는 깨어있는 자의식과 시적 자기비판에 대한 최소한의 시적 대응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최승호의 시「허공에서 쿵쾅거리다」는 물질적 향락에 도취된 삶의 공허함을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유리컵에 홀러 넘치는 횡설수설의 거품들, 너울너울 춤추는 박쥐떼로 가득찬 거리들, 굉음처럼 울려 벽을 허물어뜨리는 전자오르간의 소리들, 그리고 눈알이 거품처럼 떠다니는 시간 속의 일그러진 인간 등을 조명하는 장면 묘사는 극히 사실적이다.
도취와 환락으로 출렁거리는 세상, 거기서 사람들은 술마시고 춤을 추며 쿵쾅거린다. 그렇게 살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쉰내 나는 쓰레기 더미로 변하는 음식 찌꺼기들과/엎어진 빈 술병과 횡설수설 뒤에 찾아오는 서글픔과 참담한 새벽이 없다면』이라는 단서가 필요하다. 온갖 욕망의 배설 뒤에 오는 더 큰 서글픔과 참담함이란 물질 문명에 압도된 현대인들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최승호의 시들이 직설적인 풍자와 비판에 머물고 마는 것은 아니다.
시「흐린날」의『나는 황혼기의 별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나는 대감옥 안의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에서 보듯이 문명 비판을 통해 자신의 상상을 우주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그는 아스팔트와 빈 드럼통을 껴앉고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흐린 날이었던가, 마음이 울부짖고 싶던 날이었던가 하는 반문과 함께 극단에 달한 물질 문명의 타락을 질타하고 있다.
박세현의 시집『길 찾기』에는 타락하고 부패한 세속의 삶을 살아나가는 양심적 인간의 부끄러움과 절망이 일관되어 나타난다. 서명도, 항의도, 납치도, 고문도, 실종도, 자살도 하지 않는「나」는 누구인가. 그는 말한다.『나는 다만 눈을 껌벅이며/ 나는 쥐새끼 같이 살아 남아/나는 수면 위로 뛰어 오르는/나는 잘 썩은 고기』라고 스스로를 자학한다. 그는 올망졸망한 시를 쓰며 세끼 밥을 먹고사는 아마추어 시인이다.
그는『서슴지 말고 파업하라, 무기한 투쟁하라』고 외쳐보기도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다. 그는『쥐포 값을 깎던 손이 햇살에 젖는구나』라고 말하는 가난한 소시민이다. 그러나 그는 내장을 꺼내며 외치고 있는 양심선언을, 어두운 식탁에서 가면을 벗는 가련한 습관을 보고야 마는 시인이다.
목소리는 작고 약하지만 그는 진실하다. 최근 우리시단의 불감증 원인이 과장된 진실 때문이라면 허세 없는 진실은 귀중한 것이다.
시에서 아름다움과 감동이 사라진 오늘날 가장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참다운 진실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최동호<문화평론가·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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