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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무에 빼앗긴 안전 운항|KAL기 왜 사고 잦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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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한항공 DC 10기의 트리폴리 공항 추락 참사가 조종사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빚어졌음이 확인 된지 한달도 못돼 또다시 발생한 서울∼강릉행 F28기의 추락 사고 또한 엔진 고장과 조종사의 과실에 그 원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발생한 대한항공의 대형 운항 사고는 총 38건. 이중 25건이 조종사 실수에 기인한 것이며 정비사·기관사·항공사 등의 잘못까지 합치면 운항 관계자의 과실로 빚어진 사고는 전체 사고의 80%인 33건에 이르고 있다.
이는 대한항공의 항공기 운항·정비·점검 체제와 승무원의 교육·관리 제도뿐만 아니라 정부의 민항 운영 감독·항공기 안전 점검 체제에 심각한 구조적 결함이 도사리고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또 그동안 정부의 민항 육성 온실 속에서 성장 제일주의로 치달아온 KAL의 환부에 칼을 대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대한항공이 보유하고 있는 기종이 다양한 것이 잦은 사고를 부채질하는 큰 요인.
대한항공은 B747, DC10, A300, F28 등 모두 5종의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NWA의 3종, 일본 항공의 2종 등에 비해 다양해 대한항공은 「항공 박물관」이라고 부르는 실정.
항공기는 기종에 따라 엔진의 성능, 계기 조작 장치가 다르기 때문에 조종사·정비사들은 각기 다른 기종의 계기 조작 방법 등을 익히는데 애를 먹고 있으며 비상시 항공기의 구조를 잘 모르는 승무원들이 계기 조작 미숙 등으로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
조종사·정비사 등의 충원이 뒤따르지 못하는 무리한 운항, 증편, 노선 확장 등도 큰 문제다.
10월말 현재 대한항공이 보유하고 있는 항공기는 총63대.
조종사는 5백87명으로 항공기 대 당 조종사 수는 평균 9·3명 꼴이다. 이는 일본 항공의 16명, 스위스 항공 15명, 서북 항공 (NWA) 14·7명, 루프트한자 14·6명, 에어프랑스 14명에 비해 4∼5명이 부족한 숫자다.
이에 따라 대한항공 조종사의 평균 근무 시간도 ICAO (국제 민간 항공 기구)의 규정인 월50시간을 훨씬 초과, B747기 등 대형기 조종사는 월 80시간, F28기 등 소형기 조종사는 월65∼70시간씩의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 소형기 조종사의 경우 평균 2시간에 한번 꼴로 사고위험이 높은 이·착륙을 반복해야 하는 실정.
다양한 기종에 충분히 적응이 안된데다 격무에 따른 피로와 졸음은 계기 조작 실수, 판단착오로 이어진다는 것이 조종사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지난해 3월 이후 서울∼토론토·런던·암스테르담·자카르타·삿포로·나가사키 노선 등 8개 노선을 신설했고, 비행기 운항 횟수도 기존의 2백8편에서 2백68편으로 60편을 대폭 늘렸다.
이에 따른 빡빡한 운항 스케줄은 형식적인 정비를 부채질하고 있다.
조종사와 정비사들은 설령 체크 과정에서 웬만한 결함이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회사측이 쉴새없이 짜놓은 운항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 비행을 계속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연료비 등 경비 절감을 위해 될 수 있는 한 회항은 하지 말도록 강요하는 회사측의 구두쇠 경영 방침도 사고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트리폴리 공항 사고기의 김호준 기장은 30분 거리인 인근 공항으로 회항할 연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시계가 50m에 불과하다는 관제소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착륙하다 엄청난 참사를 빚었다.
제2민항인 아시아나항공 출범 후 양민항이 조종사·정비사 등의 스카웃 전쟁을 벌이면서 파생된 항공 기술 전문 인력의 상대적인 부족도 문제.
내년 1월부터 시작되는 아시아나항공의 국제선 취항 등 양민항의 노선 확장 등으로 양 항공사는 내년 중 조종사만 1백30명을 확보해야하나 공군 조종사출신 등 공급 가능한 조종사는 30명에 그치고 있다.
교통부 등 관계 기관의 안전 운항 확보를 위한 운항 감독·안전 점검 체제도 구멍이 뚫려있다.
현재 교통부 항공국의 관제 통신과 소속 검사계에는 검사관이 단 2명뿐이며 서울·부산 지방 항공 관리국에 속해 있는 검사관까지 합쳐도 14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10월 말 현재 우리 나라에 등록된 민간 항공기는 약 1백64대. 이를 제대로 검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40∼50명의 전문 검사 요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교통부 관계자의 추산이다.

<김창욱·이재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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