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일 무역 전쟁 "살얼음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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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미국인들의 대 일본감정이 요즘 들어 불편한 선을 넘어 불쾌감과 모욕감을 느끼는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는 느낌이다. 미국인들은 늘어만가는 대 일 무역적자와 일본인들의 잇단 미국내 부동산 매입으로 심기가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일본은 미국이 무역역조 시정을 요구한데 대해 남을 탓하기에 앞서 「미국자신의 국민성과 정책잘못」 을 고쳐야 한다는 식의 핀잔에 가까운 답변을 내놓았다.
더구나 이 같은 지적이 사석도 아닌 미일 무역회담에서 공식문서로 제출되고 일본정부가 이를 의도적으로 언론에 공개까지 했으니 미국 측의 심사가 더욱 뒤틀리지 않을 리 없다.
일본은 지난 6월 미국이 일본을 불공정 무역국가로 지정한데 큰 반발을 보이다가 지난 9월 미일무역회담에서 미국의 자긍심을 뒤흔드는 의견을 공식 정부문서를 통해 미 측에 전달했고 이달 초 무역회담에서도 구두로 이를 다시 강조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미국은 연 5백억 달러에 이르는 대 일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일본에 시장개방과 유통구조개선, 대기업의 카르텔과 영향력축소, 그리고 독점규제 등을 요구해왔다.
이에 대해 일본은 『일본만 쳐다보고 미국의 무역적자를 시정하러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반성하라』며 미국의 낮은 저축률, 교육과 기업문화의 문제점 등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일본이 미국에 지적한 것은 ▲재정적자를 줄이고 저축률을 높일 것 ▲기업들의 시설투자확대 ▲알래스카 산 석유 수출 금지 등 정부의 수출 통제 폐지 ▲기업들의 연구개발을 촉진할 정부의 인센티브제 도입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한 수출위원회를 조직, 수출을 장려하고 보조금을 지급할 것 ▲교육과 훈련에 정부와 기업지원의 확대 등이다.
특히 교육문제와 관련, 미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의 수학· 과학· 외국어교육 수준을 높여야 미국의 산업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더 나아가 부시 대통령의 교육정책을 의심했던지 현재 미 행정부 안에서 검토되고 있는 교육개혁의 골자를 제시해 주도록 요구하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일본의 지적은 미국의 경제가 어렵고 무역적자로 고전하는 것은 교육의 질이 형편없고 노동력에 문제가 있으며 낭비 만하고 저축하지 않는 베짱이 같은 생활태도와 정부정책의 잘못 등 당장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기업 경영풍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은 백 번 옳은 얘기지만 미국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분을 거슬리게 한다. 이 같은 점들은 이미 미국에서 요즘 거의 매일같이 거론되고 있고 일부는 일본의 강점으로 전문가들이 인정한 것들이다.
같은 지적이라도 자기반성을 위해 스스로 하는 것과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할 당사자가 오히려 들추어내는 것과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미국인들은 이 같은 자신들에 대한 결점의 지적이 사석이나 학술회의 같은데서 거론되는 것은 별문제가 없으나 외국정부간 공식회담에서 제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무역역조라는 두 나라간의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방어용으로 상대방의 약점을 무기로 동원하는 것은 철면피한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한편 협상에 참여한 한 일본관리는 지금까지 미국의 입장만 알려져 무역문제에 일본만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인식돼 있고 『미국이 일본제도의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스스로의 결점을 수정하는데 더 노력 해야한다』 는 점을 강조코자 이를 공개했다고 그 배경을 설명한다.
여기에는 물론 무역흑자는 결코 일본의 잘못이 아닌 미국인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논리가 깔려있다.
일본의 이 같은 자신감과 미국에 대한 「모욕적」 언사는 미일의 최근세사를 기억하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안겨주고 있다.
한마디로 패전국 일본이 오늘날 미국과 대등한 지위를 요구할 만큼 성장한데 반해 미국의 경우는 반드시 그렇지 못하다는데 불화의 원천이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일본이 오늘처럼 성장한 뒷 배경에는 계속되는 대 일 무역적자의 경종에도 불구하고 전자제품· 자동차 등 일본상품을 꾸준히 선호해 온 미국인 스스로의 소비행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뉴욕=박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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