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침입엔 총 쏴도 돼" 미국서 정당방위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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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미국에서 범죄 피해자의 정당방위권을 확대한 법률이 최근 1년 새 15개 주에서 잇따라 채택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가 7일 보도했다.

지난해 10월 플로리다 주의회는 "범죄 피해자는 도망가야 할 의무가 없고 힘에는 힘으로 맞설 권리가 있다"는 내용의 정당방위 관련 법을 통과시켰다. 도망가는 등 꼭 가해자를 죽이지 않더라도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우선 그 방법부터 시도해야 한다는 기존 조항은 삭제됐다.

이 법에 따르면 단지 자신의 집이나 차량에 무단 침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총으로 쏘아 죽였더라도 처벌받지 않는다. 정당방위의 성립 요건을 완화해 이른바 '합법적 살인'의 범위를 크게 확대한 것이다.

실제로 6월 초 플로리다에서는 쓰레기 문제로 이웃 집을 찾아가 언쟁을 벌이던 한 주민이 집주인의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으나, 총을 쏜 사람은 새 법에 따라 처벌을 받지 않았다.

피해자는 "무장도 하지 않은 내게 아무 말 없이 총을 쐈다"고 항변했으나, 새 법은 "외부인으로부터 우리 가족을 지켰을 뿐"이라는 주장을 인정해 줬다. 또 지난달에는 한 젊은 매춘부가 손님인 72세의 노인을 총으로 쏴 살해했으나 역시 기소되지 않았다.

'플로리다 법'이 통과되자 조지아.루이지애나.미시시피.사우스다코타.애리조나 등 미국 남부와 중서부의 14개 주도 앞다퉈 유사한 법률을 채택했다. 이런 움직임에는 강력 범죄 증가와 함께 미국 내 가장 강력한 이익단체인 전미총기협회(NRA)의 끈질긴 로비도 큰 영향을 미쳤다.

웨인 라피에르 NRA 부회장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짧은 시간 안에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법은 그들의 편에 서야 한다"며 정당방위권 확대를 옹호했다. NRA는 또 플로리다 법을 확산시키기 위해 내년에는 또 다른 8개 주에서 로비활동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총기 규제론자들은 이 법이 '우선 쏘고 보자(shoot first)'는 법이라며 맹비난하고 있다. "전 국민에게 살인 면허를 발급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브루클린 법대의 앤서니 세복 교수는 "플로리다의 법률은 가해자가 생명의 위협을 가하지 않아도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라며 "이는 사실상 재산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살해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비난했다. 법조계에서도 반대 의견이 다수다.

전국 지방검사협회 폴 로글리 회장은 "시민에게 경찰보다 더 많은 총기 사용 재량권을 준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조민근 기자

◆ 정당방위=위법행위이더라도 자신의 법익에 대한 부당한 침해에 맞서기 위한 것일 경우 위법성이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즉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범죄자를 죽였더라도, 살인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인정받기 위해선 일정한 요건들이 충족돼야 한다. 예컨대 위협에 비해 지나친 대응을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정당방위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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