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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서 배우는 통일의 길|김영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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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베를린 장벽을 허물어 놓고 거기서 열광하는 동·서독 사람들을 우려는 얼마나 울적하고도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의 그런 속마음은 외신에 들켰다. 베를리너모르겐포스트를 비롯한 서독 신문들은 『베를린을 향해 한국 사람들이 통한과 비애의 눈길을 보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라는 말로 한국인의 좌절을 소개했다.
정말 한국과 독일은 45년 동안 같은 분단 국가로 동병상련하는 사이였다. 두 나라의 통일조건과 주변 환경은 언제나 비교되어 왔다.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가해자요, 동·서독이 합치면 「제4 독일 제국」이 탄생할 가능성을 주변 국가들이 경계하기 때문에 통일은 한국 쪽이 빠를지도 모른다는 것이 우리의 아전인수하는 마음이었다. 우리는 남북간의 군사적인 대치 관계와 상호 교류의 축적이 거의 없다는 불리한 조건은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남북한 대표들이 판문점에서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의 규모와 텔리비전 중계 따위를 놓고 「반통일적」이라는 책망을 들어 마땅한 슬픈 입씨름을 하고 있는 동안 전후 체제의 기념비라 할 베를린 장벽이 굉음을 내면서 무너졌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라도 서독에 미군이 22만명, 동독에 소련군이 38만명이나 주둔하고 있는 현실에서 독일 민족이 자신들의 운명을 그렇게 바꿀 수 있으리라고 누가 예상인들 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독일 민족이 꾸준히 쌓아온 민족재 통합을 위한 노력의 결실이다. 아데나워와 에어하르트 시대에 이룩한 경제 발전과 브란트의 동방 정책이 동·서독 교류의 탄탄한 기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리고 서독은 동독을 개인 소득 1만2천 달러의 선진 사회주의 공업 국가로 만드는데 자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서독간에는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끊임없이 축적되어 왔다. 나라는 갈라져도 민족 공동체는 살아 있었다.
국제적인 환경에서도 당 제1서기 호네커 대신 개혁파인 크렌츠를 등장시키는데 고르바초프가 배후에서 작용했다는 보도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의 운명을 불투명하게 하는 개혁파와 보수파의 싸움은 시역 사회주의를 채택한 헝가리 모델과 중앙 집권적인 지령 경계를 유지하되 운영만을 합리적으로 하겠다는 동독 모델의 대립이다. 고르바초프로서는 동독 모델의 실패를 입증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최근 한국을 방문했던 빌리 브란트의 충고가 있다. 그는 한국의 농촌 청년들이 결혼 상대를 구하기 어려워 비관 자살하는 사례까지 있다는 사실과 노사간의 갈등, 학원 사태, 지역 감정 같은 것을 알고있었다. 어떤 사석에서 브란트는 자신이 만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서독의 통일 정책에만 관심을 갖고, 한국 사회가 앓고 있는 심각한 내부적인 갈등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더라고 걱정스러운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과연 브란트는 분단된 나라의 통일노력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우리에게 천금같은 충고를 한 것이다. 통일을 논 할 때마다 우리는 북한의 폐쇄성과 군사적인 위협을 먼저 말하고 『김일성이 살아있는 한…』이라는 꼬리를 단다. 『북한 지도자들은 오늘의 동·서독 화해와 등소평의 은퇴, 35년간 집권한 불가리아 공산당 서기장의 사임 등 공산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장기 집권의 잇단 종언 현상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이것이 독일 사태에 관한 우리 통일원장관의 논평이다. 김일성이 죽을 때까지 마냥 기다리겠다는 말인가.
건국 초에 전국의 방방곡곡에는 「한번 뭉쳐 민국 수립, 두번 뭉쳐 남북 통일」이라는 구호가 난무했다. 한번 잘 뭉친 결과인지는 몰라도 좌우간 민국은 수립되었다. 그러나 두번 뭉쳐 남북 통일을 성취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이른바 「통합의 위기」는 아직도 심각하다. 한국에 오는 북한 예술 공연단의 인원이 많고, 공연하는 곳도 많고, 또 공연 장면이 텔리비전으로 우리 안방에까지 중계되는 것이 불안할 정도면 우리는 통일을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해왔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독일에서처럼 북한에서 수십만명의 사람이 자유를 찾아 한꺼번에 휴전선을 넘어온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혼란 없이 그들을 수용할 수가 있을 것인가.
정부와 정치하는 사람들과 기업인과 노조와 운동권 학생들은 독일처럼 언젠가는 닥쳐올 민족 차원의 남북 결합을 위해서 제몫들을 다하고 있는가.
서독의 슈미트 전 총리는 앞으로 3년 동안 서독 국민들이 소득세를 5%씩 더 내어 동독 경제를 돕자고 제창하고 있다. 벌써 소득 재분배의 대상을 독일 민족 전체로 확대하자는 원대한 구상이다.
20세기 마지막 10년의 문턱에서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최정호 교수 (연대)는 동·서독의 경계선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이제 그 경계선의 의미가 달라졌다고 지적한다. 같은 말은 우리의 남북 경계선에도 해당된다. 베를린의 봄은 한반도 휴전선의 의미까지 바꾸고 있다. 달라진 휴전선의 의미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갑자기 가시화 되어 이번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이라고 외칠지 모른다.
우리는 통일에 관해 그야말로 발상의 대전환의 계기를 맞았다. 정치는 우물에서 넓은 바다로 나와야 할 때다. 유립 중원에서 역사적인 변혁이 일어날 때 우리 정치는 5공 청산의 원점을 맴돌고 있었다. 일부 운동권 학생들은 종가에서 용도 폐기 당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시끄러운 패권 다툼을 하고 있다. 꼭 역사 문맹, 국제 문맹의 나라 같다. 어느 정당도 독일에 연구팀을 보낸다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말로만 국제화시대, 정보화시대를 외칠 때가 아니다.
김일성도 언제까지나 그렇게 완강하게 도도한 변혁의 대세를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그의 황급한 중국 방문이 그 증거의 하나다.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그 대답을 독일에서 배웠다. 한국의 사회적인 통합이 우선이다. 지금처럼 모든 집단의 욕구가 충돌만 할뿐 타협점을 못 찾는 「욕망 민주주의」 아래서는 한국의 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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