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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은화의 생활건축

땅 속 문화재, 건축주는 웃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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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은화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은화 건설부동산팀 기자

한은화 건설부동산팀 기자

최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입구에 있는 재개발 구역에서 15세기에 쓰던 한글 금속활자 600점이 발굴됐다. 한글의 창시자 세종대왕의 숨결이자, 가장 오래된 활자가 발견됐으니 대사건이다. 필시 문화재가 나올 것 같은 땅이라 발굴 기간을 고려해 계약서를 두 가지 안으로 마련한 시행사도 예상치 못한 수준이었다.

공평동 15·16지구라 불리는 이 땅의 개발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문화재가 와르르 쏟아졌으니 귀한 땅을 잘 산 건축주는 웃어야 할까. 웃지 못할 일이다. 지난해 인허가를 다 받았지만, 발굴을 위해 당분간 공사가 중단될 터다. 원래 지하 8층, 지상 17층 규모의 업무 및 판매시설을 지을 계획이었다. 땅 면적만 1만2854㎡에 달한다.

금속활자가 나온 공평 15·16지구의 조감도. [사진 서울시]

금속활자가 나온 공평 15·16지구의 조감도. [사진 서울시]

한자까지 포함하면 1600점의 금속활자에 조선 전기의 유구도 상당히 나왔다. 조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이 정도 문화재가 나오면 원형보존이 원칙이다. 땅속을 원형대로 보존, 즉 지하를 파지 말고 덮어야 한다. 하지만 고층건물을 짓는데 지하 주차장은 필수다. 지하를 파지 말라는 것은 공사하지 말라는 말과도 같다. 결국 유구를 해체해서 지하를 파고, 다시 문화재를 원래 자리에 앉혀 전시관을 만들게 했다. 하지만 운영이 문제였다. 민간에서 이를 하겠다며 허가받아 건물을 지어 놓고선 전시관의 문을 닫아버리는 일도 일어났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공평동 룰’이다. 금속활자가 나온 땅 인근 공평동 1·2·4 지구(센트로폴리스 빌딩)를 재개발할 때도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유구가 왕창 나왔다. 지하 8층~지상 26층짜리 건물을 지어야 하는데 난감한 일이었다. 결국 지하 1층 전체를 유리 바닥을 깐 유적전시관으로 만들고 서울시가 이를 기부채납 받아 운영하기로 했다. 대신 건축주에게는 용적률 인센티브를 줬다.

15·16구역도 이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가 나오면 대충 치우고 건축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아쉽다. 지하에 유적 전시관을 둔 건물로 그칠 게 아니라, 그 터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건물을 디자인한다면 어떨까. 서울의 과거를 전시하는 것에서 나아가 오늘날에도 능동적이면서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선례를 만든다면 세계적인 명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는 공사 직전에야 문화재 심의를 하는 절차를 훨씬 앞당겨야 한다.

무엇보다 문화재 발굴 관련 모든 절차가 건축주의 부담으로 돌아가는 구조에서 이뤄지기 힘든 꿈이다. 문화재가 나오면 발굴 비용부터 지체되는 시간까지 건축주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니 방어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이번 기회에 ‘공평동 룰’을 뛰어넘는 창의적인 룰이 논의되고 만들어졌으면 한다.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문화재를 품은 땅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