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에 시집 낸 유안진 “터무니없이 나이만 먹었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유안진

유안진

“시험 치는 꿈을 또 꿨다/답을 다 쓰고 보니 영어 아닌 한글로 써 졌다/(중략) 꿈은 깨어져야 하는구나/꿈에서 해방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누운 채로 성호가 그어졌다.” 올해 80세가 된 시인 유안진(사진)이 쓴 시의 제목은 ‘이래도 젊고 싶냐’다. 6년 만에 시집 『터무니』(서정시학)를 낸 그는 본지와 전화통화에서 “어차피 안 팔릴 거니까 내 멋대로 쓴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등단 56년, 18번째 『터무니』 출간 #“이제 겨우 시인 지망생 된 기분”

등단 56년, 시집은 18권째인 시인의 언어는 쉽고 친근하다. 이번 시집의 제목에 대해 “인생 살아오며 터무니 없이 나이만 먹었다”고 설명했다. 표제시가 된 ‘터무니’는 “잠시도 떠난 적 없었다는 시간이/제 이름을 세월로 바꿨다고/머지않아 세기로 또 바꿀 거라는데”라며 시인이 지나온 시간에 대해 노래한다.

읽기에 쉽지만 여운은 길다. 문학평론가 유성호는 해설에서 “표면에서 감지되는 짧고 친화적인 어법의 저류에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닿아야 할 언어지의가 융융하게 흐르고 있다”고 썼다.

시집의 말투는 대체로 다정하지만 내용은 죽음과 고통을 아우른다. 2014년 세상을 떠난 남편(김윤태 서강대 명예교수)에 대해 “본질 아닌 모습으로/보고 싶다 그대 너무”(‘기일 묵상’)라 노래하고, 현관문에 일부러 놓아둔 남자 신발을 통해 혼자 사는 심경을 표현했다. 여기에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오랜 세월을 언어와 함께 한 경험까지 담았다. 유성호 평론가는 “‘시(언어)’, ‘가족’, ‘인생론’, ‘종교적 실존’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유안진 시인은 “수모를 당하면서 시인이 되기를 맹세해왔다”고 인생을 돌아봤다. “꾀죄죄한 시골 아이라고 업신여긴 선생님에게 보여주려고, 여자라고 시집만 보내려던 할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대학 시절 사범대 폐지론의 수모를 견디기 위해 시에 목숨을 걸었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 2학년에 박목월 시인을 찾아가 시를 배웠고 박목월의 추천으로 1965년 등단했다. 그는 “대학 시절 그렇게 목을 매고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등단 56년 만에 겨우 시인 지망생이 된 기분”이라고 했다. “가장 바닥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생의 자신감을 다 빼버린 다음 순수하게 쓰려 한다”고 덧붙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