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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설땅 잃어 가는 중소 양조장…곰표 맥주 대박의 그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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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68)  


대한민국 수제맥주 20년사⑦ 혼돈의 시대…수제맥주는 무엇인가

2020년 도입된 종량세 체제와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은 수제맥주 업계의 판도를 극적으로 바꿨다. 편의점에 맥주를 공급할 여력이 되는 양조장과 그렇지 못한 양조장 간의 격차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벌어진 것이다.

제주맥주는 수제맥주 업계 최초로 주식시장에 상장했고 카브루는 세 번째 공장을 완공하는 등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양조장은 성장세가 확연했다. 하지만 나머지 150여개 소규모 양조장은 생존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현재는 OEM을 통해 소수의 양조장이 전체 수제맥주 시장 파이를 키우고 있지만 앞으로는 수제맥주라는 카테고리를 온전히 대기업이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사진 pxhere]

현재는 OEM을 통해 소수의 양조장이 전체 수제맥주 시장 파이를 키우고 있지만 앞으로는 수제맥주라는 카테고리를 온전히 대기업이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사진 pxhere]

2021년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제도 변화가 이뤄졌다. 바로 맥주의 위탁생산(OEM) 허용이다. 그동안에도 양조장이 치킨업체, 펍 등 주문자의 상표를 붙여 공급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제품 개발, 납세 등은 모두 생산자(양조장)가 책임을 지는 제조자 개발 생산(ODM) 형태였다. 이번 주세법 개정으로 양조장은 단순 생산의 역할을 하고 맥주 개발이나 세금 납부 의무 등은 판매자가 지는 OEM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번 개정안에서는 위탁 생산을 맡기는 회사가 반드시 맥주 제조 면허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번 제도 변화를 겉으로만 보면 생산 용량이 적고 캔 생산 장비가 없는 소규모 양조장이 대기업에 생산을 위탁해 시장을 넓힐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대기업이 수제맥주 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한 제도로 역할을 하고 있고 수제맥주 업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고착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현재 대기업에 OEM을 맡길 수제맥주 양조장은 소수에 불과하다. 편의점에 ‘4캔 1만원’ 맥주를 공급할 여력이 있는 양조장과 대기업에 맥주 생산을 위탁할 수 있는 양조장은 정확히 일치한다. 대기업의 양조 장비를 통해 생산되는 수십만 캔의 물량을 소화할 수 있는 유통망은 편의점뿐이기 때문이다. 실제 롯데칠성음료에 생산을 위탁한 양조장은 ‘곰표 맥주’로 대박이 난 세븐브로이와 ‘제주위트에일’ 등을 편의점에서 판매 중인 제주맥주, 유동골뱅이맥주·쥬시후레쉬맥주를 편의점에 공급하고 있는 더쎄를라잇브루잉 세 곳이다. 즉, 제도 변화로 수혜를 보는 것은 클라우드, 피츠 등 자체 맥주의 판매 부진으로 20% 미만까지 떨어진 공장 가동률을 맥주 OEM을 통해 크게 끌어올리고 있는 롯데칠성음료와 기존 수제맥주 강자들이다.

롯데칠성음료가 맥주 OEM을 하고 있는 충주1공장. [사진 롯데칠성음료]

롯데칠성음료가 맥주 OEM을 하고 있는 충주1공장. [사진 롯데칠성음료]

오비맥주의 수제맥주 협업 브랜드 KBC 로고. [사진 오비맥주]

오비맥주의 수제맥주 협업 브랜드 KBC 로고. [사진 오비맥주]

그나마 현재는 OEM을 통해 소수의 수제맥주 양조장이 성장하며 전체 수제맥주 시장 파이를 키우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수제맥주라는 카테고리를 온전히 대기업이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제 더 이상 편의점이 소규모 양조장과 협력해 제품을 내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폐업 위기에 처한 소규모 양조장을 사들여 맥주제조면허를 취득한 후 대기업에 생산을 맡기면 된다. 사실 양조장을 사들일 필요도 없다. ODM 방식으로 롯데칠성음료, 오비맥주가 만든 제품을 공급받아 판매만 하는 방법이 더 용이하다.

이런 걱정은 현실화하고 있다. 오비맥주가 수제맥주 협업 브랜드(Korea Brewers Collective)의 일환이라며 출시한 백양, 노르디스크와 같은 맥주들은 사실 전혀 수제맥주와의 협업이 없다. 오비맥주가 개발하고 생산한 제품에 상표만 붙인 것이다. 오비맥주가 신제품을 런칭한 것과 다름없다.

가장 큰 문제는 장기적으로 새 브랜드라는 껍데기만 뒤집어쓴 대기업 제품이 수제맥주 시장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제맥주는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로 다양성, 맛, 브랜드 스토리 등의 측면에서 대기업 맥주와 구별된다. 소비자는 그런 차별화한 수제맥주의 가치를 소비하기 위해 카스, 테라 대신 수제맥주를 집어 든다. 하지만 현재 봇물 터진 듯 나오고 있는 제품은 수제맥주의 정체성은 잃은 채 대기업의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다. 전체 맥주시장 중 중소 양조장이 차지하는 비율은 이제 겨우 3% 남짓으로 올라왔다. 곧 다시 100% 대기업이 장악한 시장으로 회귀할지도 모른다.

인디펜던트 크래프트 브루어 씰. [자료 미국양조자협회]

인디펜던트 크래프트 브루어 씰. [자료 미국양조자협회]

미국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서 미국양조자협회(Brewers Association)는 독립적인 자본으로 운영되고 수제맥주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양조장 맥주에 ‘인디펜던트 크래프트 브루어 씰(The Independent Craft Brewer Seal)’을 붙이도록 하고 있다. 소비자가 대기업 맥주와 수제맥주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제도 변화가 시장에 끼치는 영향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재검토할 시점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각각의 영역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소비자들이 다양하고 품질 높은 맥주를 즐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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