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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버라드 칼럼

미국은 북한이, 북한은 미국이 움직이길 바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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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싱가포르 북·미 회담이 겨우 3년 전이었던가. 그 사이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당시 네 가지 약속은 결국 새드엔딩이 됐다. 영속적이고 견고한 한반도 평화체제도, 완전한 비핵화도 없었다. 6·25 전쟁 전사자·실종자 유해송환 약속도 싱가포르 회담 직후 미군 유해 55구가 송환된 이래 더 이행되지 않았다.

북한 1월 당대회서 노동당규약 개정 #일본엔 관심, 미국과 대화의지 없어

지난달 바이든 미국 정부가 대북 정책 검토를 마쳤다고 발표했다. 백악관 인사 외에 새 대북 정책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악관에선 “실용적이고 조정된 접근”이란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고 그 외엔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상술하려고 하지 않았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새로이 발표된 내용은 없었다.

물론 더 할 말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략 자체가 비어있을(hollow) 수도 있다.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현재 상황에선 북한이 행동하길 기다리면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실무 단계의 대화를 이끌어내는 전략을 추구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이는 바이든 정부의 ‘새 전략’이란 단언에도, 오바마 정부 때 부통령이던 바이든이 만든 ‘전략적 인내’와 유사하다. 바이든 정부가 실제로 이를 택했더라도 청와대를 당혹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을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결과를 내길 열렬하게 고대하기 때문이다.

북한 역시 국내·국제 정책에 대한 검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1월 북한 제8차 당대회에서 노동당 규약 개정에 이를 반영했다. 먼저 통일에 대한 태도를 누그러뜨린 게 두드러진다.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 혁명’은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의 자주적이며 민주적 발전’으로, ‘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을 통일’은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고’라는 문구로 대체되었다. 평화통일을 보다 강조한 게 청와대로선 반갑게 들렸을 것이다. 문 대통령의 그간 노력이 헛된 게 아니라고 말이다. 이 변화가 그러나 북한이 장차 협조할 것이란 걸 의미하지 않는다. 남·북의 통일 비전은 다르다. 이런 식의 개정은 필요했으나 충분하진 않다.

‘일본 군국주의와 재침 책동을 짓부수며’라는 문구 삭제 또한 의미심장한 변화다. 북한은 경제 원조가 필요하고 중국에 대한 의존 탈피를 갈망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호의에도 가까운 시일 내 남한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러시아는 수년간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트럼프 정부도 지원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이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아마도 정치적 의지도 가진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일본인 납치 문제가 해결되고 국교정상화 합의가 이뤄지면 말이다. 적대적인 문구를 삭제한 건 역시 필요했으나 충분하진 않다.

북한 정권이 미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싱가포르 선언 등을 당 규약에 반영했을 것이다. 그런 변화는 없었다. 미국과 관련되어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이란 문구를 추가했다. 이는 북한이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미국과의 대화에 관심이 없다는 신호다.

즉, 북한의 새 전략은 ▶일본과의 대화에 문을 열어두고 ▶남한과의 궁극적인 통일에 대해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관심을 나타내고 ▶미국과는 대화할 생각이 없을뿐더러 남한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이에 비해 미국의 전략은 북한이 먼저 움직이길 바라며 지켜보는 것 같다.

이런 두 입장은 완전한 마비를 낳는다. 미국은 종종 공이 북한 코트에 있다고 말하는데 비해 북한은 공이 미국 코트에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를 보면 아예 코트에 공이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누군가 접근법을 바꾸지 않는 한 경기 재개엔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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