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김병준의 더 큰 잘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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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병준 교육부총리가 결국 사의를 표명했다. 논문 스캔들에 대해 그는 '관행'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면죄(免罪)될 수는 없다. 그는 노무현 정권의 '혁신 전도사'였다. 혁신이란 관행을 깨는 것이다. 그의 관행 논리는 일종의 자기 부정(否定)이다.

논문도 문제지만 그에게는 더 큰 잘못이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것이다. 이 정권은 권위주의 해체, 권력기관 독립, 정치 정화(淨化) 등 적잖은 공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외교, 대북관계, 국민화합, 현대사 평가, 국내 정책 등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서 실점을 거듭했다. 그 결과가 5.31 지방선거였다. 정권의 실점은 상당 부분 노 대통령의 편향된 역사관.세계관.사회관 때문이다. 김 부총리는 오랜 세월 노 대통령과 깊이 교유하면서 그의 의식구조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정권의 과실에 김 부총리의 책임이 큰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이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듬해인 1993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국민대 교수 김병준은 지방분권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노 전 의원이 만든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강연을 하곤 했다. 그는 "정치인 연구소라 해서 간판만 있을 줄 알았는데 '실무'라는 이름처럼 정말 실체가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보좌진이 헌신적인 걸 보고 노 소장이 인복이 있다고 느꼈다"고도 했다. 두 사람은 나라와 역사의 여러 문제에 뜻이 맞았다. 곧 노 소장은 이사장이 되고 김 교수는 소장을 맡았다. 노.김 연대의 탄생이었다.

그는 노 대통령과 많은 것을 공유했다. 김 부총리는 "노 대통령하고는 인간관계보다는 생각이 같아서 맺어진 인연"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자율과 분권에 대한 철학이 같았고 경제에 대한 생각도 비슷했다"고 한다.

다른 것도 많이 비슷했다. 김 부총리도 노 대통령처럼 가난했다. 그는 "여섯 식구가 11평에서 살았다"고 기억한다. 대통령처럼 비주류의 인생을 살아 왔다. 그는 대구상고.영남대를 졸업한 뒤 국내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미국 델라웨어 대학으로 갔다. 장학금 때문이었다. 이런 경력이 노 대통령과 그를 더 단단히 엮었다.

정권의 표류는 어찌 보면 노.김 연대의 실점이라 할 수 있다. 김 부총리는 정권 로드맵의 상당 부분을 그렸다. 그는 90년대부터 정치인 노무현과 행정수도를 꿈꿨다. 혁신도시도 생각했다. 집권해서는 부동산.세금.정부혁신 등 주요 국정을 챙겼다. 그런데 지금 국정은 어디에 가 있는가. 행정수도는 위헌 결정을 받았고, 혁신도시들은 설계사들조차 회의적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제대로 될 거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천도(遷都) 소동과 혁신.행정 도시 때문에 전국의 땅값만 올랐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없지만 한.미 동맹, 현대사 평가, 북한 정권에 대한 노 대통령의 사고에도 김 부총리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기자에게 "왜 노무현은 싸우면 지지 않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곤 스스로 "미래적 가치, 역사의 방향과 같이 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맞다. 정치인 노무현은 많은 싸움에서 이겼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통령의 국정 수행이란 가장 큰 싸움에서 밀리고 있다. 5월 31일의 참패는 가고자 했던 방향이 잘못됐다는 국민의 심판이다.

김 부총리는 청와대 정책실장 시절 "학자 출신으로 한 국가의 거시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에 앉았으니 좋은 경험"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대로 그는 큰 게임을 했다. 그러나 졌다. 그렇다면 5.31 선거가 끝난 뒤 모든 것을 깨끗이 접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다. 나는 확신한다"고 버텼다. 그러곤 교육부총리로 거칠게 달려갔다. 잘못된 확신이 비극을 불렀다.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