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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타도 되나" "무관중 경기 OK?" 전세계가 그에게 물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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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통.
2020년 3월,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 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NIAID) 소장이 받은 하루 평균 e메일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그때 그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미운털이 박혀도 ‘소신 발언’을 쏟아내면서였다. 그는 자신의 조언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그는 최선을 다해 e메일에 답변을 보냈고, 자신을 향한 공격에도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2020년 3월 코로나19 대응 언론 브리핑을 마치고 돌아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왼쪽)과 미국 국립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NIAID)의 앤서니 파우치 소장(오른쪽). [로이터=연합뉴스]

2020년 3월 코로나19 대응 언론 브리핑을 마치고 돌아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왼쪽)과 미국 국립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NIAID)의 앤서니 파우치 소장(오른쪽). [로이터=연합뉴스]

1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 버즈피드 등 미언론은 지난해 1~6월 팬데믹 초기 파우치 소장이 사람들과 주고받은 e메일을 공개했다. WP와 버즈피드는 정보 자유법에 근거한 공개 청구를 통해 그의 e메일을 입수했다. 두 매체가 공개한 e메일 분량은 각각 866페이지, 3234페이지에 이른다.

코로나 사태에 지구촌 상담사 됐던 파우치 #WP 등 지난해 1~6월 파우치 e메일 입수 #코로나 팬데믹 초기, 하루 e메일 1000통 이상 #방역혼선 e메일 도움 요청에 고군분투

공개된 메일에 따르면 파우치 소장은 동료, 외국 정부, 스포츠리그 의무진, 영화사 대표, 일반인까지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사람들은 파우치 소장에게 비행기를 타도 되는지부터 코로나19 음모론까지 각양각색의 질문을 던졌다. 인터뷰 요청도 쇄도했다. 이탈리아의 한 언론사는 끊임없이 인터뷰를 요청했고, 한 출판사는 공동 집필 제안을, 영화사는 다큐멘터리 출연을 요청했다. 미국프로풋볼(NFL) 운영팀은 시즌을 앞두고 “관중이 없더라도 경기를 진행해도 되겠냐”고 은밀하게 물었다. WP는 파우치 소장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답변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며 “트럼프 행정부의 혼란스러운 대응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전했다.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 백신 프로그램 책임자 에밀리오 에미니가 지난해 4월 1일 파우치 소장에게 보낸 e메일. [워싱턴포스트 캡처]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 백신 프로그램 책임자 에밀리오 에미니가 지난해 4월 1일 파우치 소장에게 보낸 e메일. [워싱턴포스트 캡처]

e메일 상당수는 파우치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메시지였다. 최측근들은 그의 과로를 걱정했다. 그가 밤낮없이 인터뷰와 연구에 매진한 탓이었다. 팬데믹 초기부터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논의해 온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 백신 프로그램 책임자 에밀리오 에미니는 지난해 4월 2일 메일에서 “거의 매일 TV에서 당신을 본다. 에너지가 넘친다는 건 알지만, 당신이 심히 걱정된다”고 적었고, 미 국립보건원(NIH) 원장인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잠 좀 자!”라고 조언했다. 그때마다 파우치 소장은 “현재 상황에서 가능한 많이 참여하려고 노력할 것”이라며 좀처럼 열정을 꺾지 않았다는 게 외신의 설명이다. CNN은 그의 e메일에 대해 “그의 답변은 언제나 즐겁고 활기찼다”고 평가했다.

이런 그의 태도에 공화당 내부에서도 격려의 메시지가 나왔다. 4월 11일 프레드 업튼 공화당 연방하원의원(미시간)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코로나19 치료제라고 선전했던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의 효과가 있는지 물었고 파우치 소장이 “거의 확실히 그렇지만 데이터가 부족하다”고 답했다. 이에 업튼 의원은 “과학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계속해 달라”며 그를 지지했다고 한다.

앤서니 파우치 NAID 소장이 지난 5월 코로나19 언론 브리핑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앤서니 파우치 NAID 소장이 지난 5월 코로나19 언론 브리핑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물론 그를 공격하는 e메일도 꾸준히 받았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압박도 거세졌다. 당시 파우치 소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재개’ 움직임에는 신중론을 ‘노마스크’ 행보엔 마스크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이에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를 비판하고 협박했다.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의 측근인 마크 쇼트 전 부통령 비서실장의 경우 e메일을 통해 “당신은 ‘증상’은 정확하게 진단했지만 ‘원인’은 틀렸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파우치 소장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는 13시간 뒤 “조언에 감사하다. 알겠다. 가족과 평화롭고 즐거운 하루 되길 바란다”고 짧게 답장해 대립을 피했다.

마크 쇼트 전 부통령 비서실장이 e메일에서 “당신은 ‘증상’은 정확하게 진단했지만 ‘원인’은 틀렸다”고 지적하자 파우치 소장은 "알겠다"고 짧게 답변했다. [워싱턴포스트 캡처]

마크 쇼트 전 부통령 비서실장이 e메일에서 “당신은 ‘증상’은 정확하게 진단했지만 ‘원인’은 틀렸다”고 지적하자 파우치 소장은 "알겠다"고 짧게 답변했다. [워싱턴포스트 캡처]

버즈피드는 그가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낸 표현은 “이키(yikes)” 정도로, 어떤 공격성 메일에도 “감사하다”, “논의해보자”는 말로 격식 있게 대했다고 평가했다. 이키는 갑자기 놀라거나 겁을 먹었을 때 내는 표현이다.

감정은 자제했지만,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고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에는 거침없었다. 3월 8일 그레그 곤살베스 예일대 공중보건 역학 부교수에 보낸 답변이 그랬다. 곤살레스 부교수는 e메일에서 “실질적인 지침을 신속하게 제시할 분명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미국 연방 정부의 코로나19 TF 대응팀에 불만을 쏟아냈다.

지난해 4월 그레그 곤살베스 예일대 공중보건 역학 부교수가 파우치 소장에게 보낸 e메일. 곤살레스 부교수는 e메일에서 미국 연방 정부의 코로나19 TF 대응팀에 불만을 쏟아냈다. [버즈피드 캡처]

지난해 4월 그레그 곤살베스 예일대 공중보건 역학 부교수가 파우치 소장에게 보낸 e메일. 곤살레스 부교수는 e메일에서 미국 연방 정부의 코로나19 TF 대응팀에 불만을 쏟아냈다. [버즈피드 캡처]

이에 파우치 소장은 3시간 만에 답변을 보냈다. 그는 답장에서 자신이 속한 코로나19 TF 대응팀이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행보에 발맞추듯 묘사된 것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파우치 소장은 “나는 과학 외에는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항상 공중보건에 관한 내 생각을 말한다”면서 “나는 누군가의 잘못된 발언을 꾸준히 수정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당시 마스크 쓰기, 사회적 거리 두기를 외면해 비판받던 트럼프 행정부와 입장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전한 것이다. 하지만 파우치 소장은 e메일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직접 비판한 적은 없다고 WP는 전했다.

3월과 4월 가오푸(高福) 중국 질병통제예방센터 주임과 주고받은 e메일에서는 그가 중국 보건 전문가와 관계를 놓지 않으려 한 노력도 엿보였다. 당시 가오 주임이 자신의 발언을 잘못 인용한 미국 사이언스지의 보도에 문제를 제기하며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파우치 소장에 e메일을 보내자 그는 “이해한다. (우리는) 함께 바이러스를 이겨낼 것”이라고 답했다. 또 한 달 뒤 가오 주임이 응원 메일을 보내자 파우치 소장은 “친절한 메일에 감사하다. 이쪽 세상에 몇몇 미친 사람들이 있지만, 모든 것이 괜찮다”고 답장했다.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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