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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재킹한 벨라루스 독재자, 잔다르크가 두려웠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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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020년 7월 대선 당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 맞서 출마한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 후보(가운데)를 지원한 베로니카 체프칼로(왼쪽)와 마리아 콜레스니코바(오른쪽). [타스=연합뉴스]

2020년 7월 대선 당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 맞서 출마한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 후보(가운데)를 지원한 베로니카 체프칼로(왼쪽)와 마리아 콜레스니코바(오른쪽). [타스=연합뉴스]

유럽연합(EU)이 24일(현지시간) 야권 인사 라만 프라타세비치(26)를 체포하기 위해 지난 23일 전투기까지 동원해 아일랜드 항공사 라이언에어(RYANAIR) 소속 여객기를 강제 착륙시킨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에 나섰다. AP 등은 이날 EU 27개 회원국이 임시 정상회의를 열고 벨라루스 여객기가 EU 영공을 비행하고 공항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경제 제재안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정상들은 향후 벨라루스 고위 관리와 기업을 더 광범위하게 제재하겠다고 밝혔다. 또 EU 항공사에 벨라루스 상공 비행을 피하도록 당부했다.

벨라루스의 잔다르크 3인 #교사·외교관 아내·플루트 연주자 #27년 독재에 맞서 투쟁 이끌어 #‘잔다르크’ 회의 참석 인사 잡으려 #대통령, 민항기 강제 착륙 지시 #EU ‘벨라루스기 비행금지’ 제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이날 “벨라루스의 강제 착륙과 프라타세비치 체포는 국제 규약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이라며 “미국은 가장 강력한 용어로 이번 사태를 규탄한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이 충격적인 사건과 협박을 받고 촬영한 듯한 프라타세비치의 영상은 정치적 이견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부끄러운 공격”이라며 “EU의 제재 결정을 환영하며 미국 역시 이에 상응하는 적절한 방침을 마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1994년 벨라루스 독립 이후 권좌에 오른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 체포된 프로타세비치와 야권의 여성 지도자에게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벨라루스의 잔다르크들과 프로타세비치는 긴밀한 협력관계다. 외신은 이들을 ‘벨라루스의 잔다르크’라고 부르는데 지난해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추천됐다.

지난 23일 루카셴코 대통령이 강제 착륙시킨 라이언에어 항공기. [EPA=연합뉴스]

지난 23일 루카셴코 대통령이 강제 착륙시킨 라이언에어 항공기. [EPA=연합뉴스]

루카셴코 대통령이 미그 29기까지 띄우면서 체포한 인물은 로만 프로타세비치. 뉴욕타임스(NYT)·BBC 등 외신은 24일 “프로타세비치는 누구인가”라는 등의 제목으로 그에 대한 인물 탐구를 집중적으로 쏟아냈다. NYT는 프로타세비치 체포를 두고 영화 ‘제이슨 본’ 시리즈의 모든 요소를 갖춘 드라마라고 짚었다.

그간 루카셴코 대통령은 시위대 진압을 위해 실탄 발포는 물론 인터넷 차단, 언론인 탄압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프로타세비치의 텔레그램 채널, 넥스타(Nexta)였다. 정권 통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텔레그램을 통해 시위 일정 및 장소를 공유하고 해외에 상황을 알렸다. 벨라루스의 잔다르크들에겐 긴요한 채널인 반면 루카셴코에겐 눈엣가시였다.

루카셴코 대통령이 강제 착륙시킨 항공기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출발해 벨라루스 이웃 국가인 리투아니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왜 하필 아테네였을까. 잔다르크들의 대표 인물 격인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가 그리스에서 경제 관련 회의를 열었고, 프로타세비치는 그 회의에 참석했다. 두 사람은 각각 2020년과 2019년 체포 및 구금을 피하기 위해 리투아니아로 망명했다.

티하놉스카야는 벨라루스 민주화운동의 얼굴과 같은 존재다. 지난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야권 대표 후보로 입후보했고, 부정선거 의혹 속에서도 10% 가까운 득표를 기록했다. 실제 득표는 더 높았을 거라는 게 야권 및 서구 언론의 분석이다. 루카셴코 대통령이 비밀리에 기습 취임식을 열자 티하놉스카야는 “이건 광대극”이라며 “아무도 당신을 벨라루스의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대선 결과 불복을 선언하고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장을 접수하러 가다 당국에 구금됐다. 하루 뒤 풀려난 그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리투아니아행을 택했다.

처음부터 티하놉스카야가 민주화 투사였던 건 아니다. 그는 평범한 영어 교사였다. 그러나 남편이 야권 성향의 블로그를 운영하다 정권에 체포된 뒤 분노의 투사로 변신했다. 또 다른 잔다르크들 역시 벨라루스의 독재로 인생 항로를 틀었다. 베로니카 체프칼로는 외교관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미국 및 멕시코 주재 벨라루스 대사였던 남편을 따라 시위 현장으로 나갔다. 남편이 정권에 항거하는 의미로 대선 후보로 등록하려다 거부당하고 체포된 뒤였다. 그 역시 체포 위협에 시달리다 러시아로 망명했고, 계속 반정권 시위에 가담하고 있다.

가장 마지막까지 벨라루스에 남아있던 잔다르크는 마리아 콜레스니코바다. 1982년생인 그는 독일을 넘나들며 연주 생활을 하던 플루트 연주자였다. 그는 체프칼로와 함께 뜻을 모아 티하놉스카야를 대선 후보로 옹립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고, 유세장에서도 에너자이저 같은 존재로 활약했다. 그러나 대선 뒤인 지난해 9월 그는 돌연 실종됐다. 이후 당국에 의해 구금 중인 사실이 밝혀졌고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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