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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몸의 상처와 역사의 상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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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봄 햇살이 가득한 요즘 서울 율곡로의 아트선재센터에서는 천지에런(陳界仁, 1960~)의 한국 최초 개인전 ‘傷身·流身(상처 입은 몸, 흘러가는 몸, 5월 2일까지)’전이  열리고 있다. 천지에런은 1949년부터 38년간 지속됐던 군사계엄령 시기 타이베이에서 나고 성장한 대표적 반체제 작가다. 국민당이 만든 ‘임시조례’로 정당 창당이 불법인 가운데 입법위원 선거가 치러지던 1983년, 그는 사형수가 머리에 쓰는 용수를 뒤집어쓰고 사복경찰이 깔린 시먼딩 거리를 고함을 지르며 달림으로써 통제와 억압에 몸으로 저항하는 게릴라식 퍼포먼스를 펼쳤다. ‘상신·유신’전은 1987년 계엄이 해제되고 총통 직선제와 신당 창당 등 민주화가 본격화되면서 8년간 작품을 중단했던 작가가, 활동을 재개한 후 제작한 총 8편의 영상과 사진작업으로 구성됐다.

공장, 2003, 단채널 컬러영상, 무성, 31분.

공장, 2003, 단채널 컬러영상, 무성, 31분.

흑백 영상 ‘능지’는 20세기 초 한 프랑스 병사가 찍은 중국의 ‘능지처참형’ 과정을 슬로모션으로 확대했다. 결의에 찬 집행관들의 표정, 사형수의 몸을 뚫고 나오는 쇠꼬챙이와 주입된 아편으로 혼미해진 사형수가 죽기 직전 보이는 미소에 이르기까지 잔혹한 현장을 세 개의 대형 화면으로 드러냄으로써 상처를 가하는 자와 받는 자, 이를 관찰하는 자의 시선을 포착한다. 죽은 자의 몸에 난 구멍은 카메라 렌즈가 되어 서구 열강이 파괴한 북경의 원명원, 일제의 생체 실험실, 백색테러 시기의 사상범 감옥을 비추고 이는 피식민으로 시작된 근대의 역사가 현대까지 흘러옴을 보여준다.

1990년대 대만 공장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임금이 싼 해외로 작업장을 옮기고 이로 인해 대량 실업자가 발생한다. ‘공장’은 1996년에 폐업한 리엔푸 피복공장에,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회사와 투쟁했던 옛 여공들을 불러 모아 옷을 만들게 하고 이를 촬영한 영상작품이다. 카메라는 헝겊을 관통하는 미싱 바늘과 어색한 듯 공들여 실을 꿰는 그녀들의 투박한 손을 소리를 제거한 채 클로즈업하며(사진), 장면은 1970년대 국민당이 제작한 산업홍보 영상 속 젊은 여공들로 교차된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노동을 잃은 리엔푸 공장 여공들은 평생을 공장 노동자로 살아온 천지에런의 누이이자, 실직하고 우울증을 앓다 자살을 시도했던 그의 친형인 동시에 공장 이전으로 버려진 무수한 임금노동자들이기도 하다.

천지에런의 작업은 적나라한 삶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영상 미학의 힘을 잘 보여준다. 작가가 느린 화면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은 평온을 가장한 일상 그 밑바닥에 존재하는 공포와 불안, 그 근원에 카르마처럼 자리한 역사의 상처일 것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고통을 무릅쓰고 이를 직시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해결되지 못한 역사는 우리 몸에 상처로 새겨지고 다음 세대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