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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선

유족 가슴에 또 못 박은 정부의 천안함 추모식 축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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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3월27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분향하던 중 천안함 유족 윤청자 여사로부터 ″천안함이 누구 소행이냐″는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3월27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분향하던 중 천안함 유족 윤청자 여사로부터 ″천안함이 누구 소행이냐″는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허,참…정치인들 참석을 불허한다고요? 처음 듣는 얘깁니다. 이건 뭐…행사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게 다 보이네요."
 23일 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성우 천안함 유족회장의 목소리는 한숨으로 가득했다.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다 삐져나온 포한(抱恨) 그 자체였다.
 정부는 오는 26일 서해수호의 날 행사와 천안함 폭침 11주기 추모식에 정치인들의 참석을 불허했다. 달랑 5당 대표와 국회 국방·정무 위원장 등 7명만 초청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대표 직무대행과 민홍철 국방위원장, 윤관석 정무위원장이 모두 민주당 소속이다.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 여영국 정의당 대표까지 합하면 범여권이 5명이다. 야당은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등 2명에 불과하다.
 보훈처는 이런 '축소 개최' 방침을 유족들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이성우 유족회장조차 행사 사흘 전 필자의 전화를 받고 상황을 처음 파악했다. 다만 국회에선 "정부가 천안함 행사를 축소하려 한다"는 소문이 열흘 전부터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국민의힘 국방위 간사인 한기호 의원은 황기철 보훈처장에게 전화를 걸어 "적어도 국회 국방위원들은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황 처장은 "알았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돌연 나흘 전쯤 국장급 실무자가 한 의원에게 연락을 해왔다. "코로나 문제도 있고, 장소가 협소해 참석하실 수 없습니다"고 했다. 국방위원인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은 "황 처장은 야당 의원들도 참석시키려 했는데 돌연 윗집(청와대)에서 오더(불허)를 내리니까 난처해서 부하를 시켜 통보한 듯하다"고 했다.
 격분한 국민의힘 의원들이 추궁에 들어가자 군은 지난해 12월 '4·7 재·보궐 선거 관련 정치인 부대 방문 지침'을 마련해 선거 기간에 정치인의 부대 방문을 금지한 결과라고 해명했다. 도대체 서해를 지키다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게 선거와 무슨 연관이 있나? 당장 지난해 군부대에 해당하는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열린 천안함 추모식은 4·15 총선을 20일 앞둔 3월 26일 개최됐다. 그러나 유승민·유의동·안규백 의원 등 정치인들이 아무 제한 없이 참석했다. 또 그전에도 선거를 목전에 두고 천안함 추모식이 열린 적이 많았지만, 정치인 참석이 불허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추모식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논란이 인 적도 물론 전무했다.
 이뿐 아니다. 해군은 유족을 팔아 거짓말을 했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천안함 등 북한 도발 희생자 추모식마다 빠짐없이 참석해온 유승민 전 의원의 전언이다.
"문 대통령 집권 초반 제2연평해전 추모식(매년 6월 29일)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해군에 전했는데 그쪽에서 '유족들이 원하지 않는다'고 통보해와 추모식에 불참했다. 얼마 뒤 유족들이 연 바자에 갔다가 고 한상구 중사 부인을 만나 '유족들이 제 참석을 원하지 않으셨다면서요?'라고 물으니 부인은 놀라며 '그런 적 없다'고 하더라. 해군이 내 참석을 막고 행사를 축소하려고 거짓말을 한 거다."

10년째 정치인들 참석해온 추모식 #4·7 재·보선 이유로 정치인 참석 불허 #유족에도 안 알려… "이게 나라냐?"

 문 대통령은 집권 뒤 서해수호의 날 행사를 두 번 패싱했다. 한번은 베트남 방문, 한번은 대구 방문 때문이었다. 조국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들의 추모식에 불참하다가 지난해 처음 추모식에 참석했다. 총선 20일 전이라 "선거를 의식해 나온 것 아니냐"는 논란을 샀다. 게다가 문 대통령은 추모사에서 '북한'의 '북'자도 꺼내지 않았다. 코로나 방역 잘했다는 자화자찬으로 추모사를 메워 참석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답답한 마음에 유족 윤청자 여사가 문 대통령에게 다가가 절규했다. "사람들이 천안함이 누구 짓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가슴이 무너진다. 대통령께서 늙은이의 한을 꼭 좀 풀어 달라." 그러자 문 대통령은 작은 목소리로 "북한 소행이란 정부 공식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천안함 폭침에 대해 문 대통령은 당 대표로 취임한 2015년에 처음 "북한 소행"이라고 발언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천안함의 '천'자도 꺼내지 않다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3년 만에 공개 석상에서 유족의 추궁을 받은 끝에 "북한 소행"이라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이 정부는 2018년 평창 올림픽에 북측이 천안함 폭침 주범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보내자 국빈으로 예우하며 면죄부를 줬다.
 유승민 전 의원은 군의 이례적인 천안함 추모행사 축소 배경에 대해 "추모식 안 하면 욕먹을 테니 하기는 해야겠는데 북한이 의식되니 최대한 줄여 치르려는 게 본심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 추측이 사실이 아니기만 바랄 뿐이다.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