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30만명 경성서 5만명이 봤다…99년전 우리 하늘 난 韓파일럿

중앙일보

입력 2021.03.19 06:00

업데이트 2021.03.19 15:06

강갑생의 바퀴와 날개’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국립항공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안창남의 '금강호'. [사진 국립항공박물관]

국립항공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안창남의 '금강호'. [사진 국립항공박물관]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

 민요 '청춘가'를 개사한 이 구전 가요에 등장하는 안창남(1901~1930년)은 비행기 조종사입니다. 당시 유명한 사이클 선수이던 엄복동(1892~1951)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핍박받던 우리 민족에게 큰 위안을 준 인물이었습니다.

 국립항공박물관 등의 자료에 따르면 안창남은 우리 하늘을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 조종사란 기록을 갖고 있는데요. 1922년 12월 10일 여의도 간이비행장을 이륙하는 그의 비행기를 보기 위해 무려 5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모였다고 합니다.

 1922년 한국인 최초로 우리 하늘 비행 

 당시 경성(지금의 서울) 인구가 30만명이었다고 하니 경성인구 6명 중 한명은 안창남을 보기 위해 여의도를 찾은 셈인데요. 이 가운데 1만명은 학생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지방에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해 남대문역에서 하루 4회의 임시열차를 할인 운행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여의도에서 시범비행을 준비 중인 안창남. [사진 국립항공박물관]

여의도에서 시범비행을 준비 중인 안창남. [사진 국립항공박물관]

 영하의 날씨에 강풍까지 부는 악조건이었지만 안창남은 자신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위해 시범비행을 강행했고, 두 차례 모두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금강호'라 이름 붙인 비행기는 남산을 돌아 창덕궁 상공을 거쳐 다시 여의도에 착륙했는데요. 우리 항공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비행이었습니다.

 그가 탄 금강호는 프랑스 뉴포르사의  항공기에 여러 비행기의 부품을 조합해 제작한 것으로 양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었다고 하는데요. 일제강점기하에서 태극기를 사용할 수 없는 시대 상황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안창남 보러 여의도에 5만 관중 모여 

 앞서 우리 하늘을 처음 비행한 건 1913년 일본인 조종사였다고 합니다. 이어 미국과 이탈리아 조종사가 비행했다는 기록도 있는데요. 그러나 한국인 조종사가  직접 비행기를 몰고 우리 하늘을 난 건 안창남이 최초였습니다.

 시험비행 뒤 안창남은 다음 해 1월 잡지「개벽」에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조국의 하늘을 비행하는 감격과 식민지라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안창남이 1923년 1월 개벽에 기고한 글. [사진 국립항공박물관]

안창남이 1923년 1월 개벽에 기고한 글. [사진 국립항공박물관]

 오늘(19일)이 식민지 조국의 영웅이었던 안창남이 탄생한 지 꼭 120년 되는 날입니다. 그는 1901년 3월 19일 서울 평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6살이던 1917년 9월 서울 용산에서 열린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는 조종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19일이 안창남 조종사 탄생 120주년   

 그는 1919년 8월 일본 도쿄의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 기계부에서 비행 조종을 배운 뒤 이듬해 8월에는 도쿄 오쿠리 비행학교에 입학해 석 달 만에 졸업했다고 하는데요. 그해 12월 잡지 「개벽」에 '조선 비행기 안창남'이란 기사가 실려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기사를 쓴 사람은 당시 「개벽」의 도쿄 특파원을 지낸 소파 방정환(1899~1931) 선생이었습니다. 안창남도 이 잡지에 '오쿠리 비행학교'에서라는 수필을 썼다고 합니다.

안창남의 시범비행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사진 국립항공박물관]

안창남의 시범비행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사진 국립항공박물관]

 스무살이 된 안창남은 1921년 5월 일본 민간비행사 시험에서 합격해 면허증을 받았고, 한 달 뒤에는 지바에서 열린 민간항공대회에서 2등을 차지합니다. 같은 해 7월 동아일보는 '신 비행가 안창남 동경 소율 비행학교 조교수, 금년 이십 세의 조선청년'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1926년 중국서 독립운동 뛰어들어  

 이듬해 우리 하늘을 성공적으로 비행한 안창남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을 맞게 되는데요. 대지진으로 그가 몸담았던 오쿠리 비행학교도 파괴돼 문을 닫게 됩니다.

 그러자 안창남은 1926년 몽양 여운형(1866~1947) 선생의 권유로 중국 산시성의 군벌인 옌시산의 휘하에서 항공중장과 산시비행학교장을 맡습니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입니다. 그는 또 상하이에 본부를 둔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공명단에도 가입했는데요.

국립항공박물관에 세워진 안창남 동상. [강갑생 기자]

국립항공박물관에 세워진 안창남 동상. [강갑생 기자]

 안창남이 1929년 비행대의 설립을 목표로 국내에 파견된 공명단원 최양옥과 김정련 등에서 당시로써는 큰 금액인 600원을 제공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매일신보가 '제남서 안창남 씨에게 육백 원을 위선바더'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고, 그때 체포된 최양옥도 광복 후 쓴 수기에서 안창남이 공명단의 주축이었다고 적었다고 합니다.

 항공박물관, 다양한 안창남 기념행사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독립운동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30년 4월 산시비행학교에서 비행 교육을 하던 중 추락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만 29세의 너무나도 젊은 나이였습니다.

 최정호 국립항공박물관장은 "안창남 조종사는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우리 민족과 비행사에 남긴 발자취는 너무나도 크다"고 평가합니다. 국립항공박물관은 안창남 탄생 120주년을 맞아 '떴다 보아라! 안창남' 이란 제목으로 그의 생을 조명하는 작은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국립항공박물관 1층에서 열리고 있는 상설 전시회. [사진 국립항공박물관]

국립항공박물관 1층에서 열리고 있는 상설 전시회. [사진 국립항공박물관]

 오는 10월에는 '대한독립의 염원을 조국의 하늘에, 대한민국 항공 선각자 이야기'라는 주제로 안창남 탄생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도 준비 중인데요. 11월에는 생가에 표지석도 세우기로 했습니다.

 안창남이 우리 하늘을 비행한 지 꼭 100년이 되는 내년에는 금강호를 재건해 당시의 시범비행을 재현하는 행사도 기획 중입니다. 최 관장은 "다양한 행사를 통해 민족의 영웅이었던 안창남을 다시금 새롭게 기억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