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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주왕 그놈마저 잡았다, 한국 마약왕 5인 검거 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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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금 막 잡혔습니다.”

지난달 19일 경찰청 인터폴계 태국 담당에게 걸려온 전화 목소리는 다급했다. 경찰 태국주재관이었다. 그는 “태국 마약통제청과 공조로 저희가 쫓던 A가 검거됐다”고 했다. 약 5년 만에 ‘동남아 벨트 한국인 마약왕 5인방’ 소탕 작전이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5인방은 동남아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하며 국내로 마약을 밀반입해 온 핵심 마약범들이었다.

영화 '마약왕' 포스터. 중앙포토

영화 '마약왕' 포스터. 중앙포토

지난달 19일 태국 방콕에서 숨어있다가 붙잡힌 A(48)는 지난해 3월부터 11월까지 총 5회에 걸쳐 필로폰 6.3㎏(시가 210억원 상당)을 밀수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1회 투약량(0.03~0.05g)을 고려하면 21만여명이 투약할 수 있는 양이다. A를 비롯해 최근 5년간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온 거물급 한국인 마약사범은 5명 정도라는 게 국가정보원 등 수사 당국의 설명이다. 현지 교도소 수감 중 두 차례나 탈주한 ‘탈주왕’도 있었다.

2019년 1월 18일 캄보디아에서 '한사장'으로 불렸던 마약사범 한모씨가 인천공항을 통해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2019년 1월 18일 캄보디아에서 '한사장'으로 불렸던 마약사범 한모씨가 인천공항을 통해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①캄보디아 ‘한사장’

수사 기관이 동남아에 근거지를 둔 한국인 마약조직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 5월. 필로폰 단순 투약자들이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으로 공급자와 접촉했다”고 털어놓으면서다. 경찰이 국내 판매책과 밀반입책을 거슬러 올라가던 도중 국정원이 캄보디아에 근거지를 둔 한국인 마약조직이 필로폰을 국내에 공급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하부 조직원들로부터 ‘한사장’으로 불렸던 B(61)다. 그는 2018년 12월 캄보디아 프놈펜 자택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붙잡혔다. 2016년부터 2년간 총 6㎏, 시가 180억원 상당의 필로폰을 국내에 공급한 혐의였다. B 일당은 캄보디아 ‘무료관광’을 시켜준다는 말로 주부 등을 마약 밀반입책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600억원대 필로폰을 밀수입한 뒤 태국에서 도피 생활을 벌인 '아시아 마약왕' 호모(56)씨가 지난해 5월 국내로 강제 송환돼 구속 기소됐다. 사진은 A씨가 인천국제공항에서 호송되는 모습. 사진 인천지검

600억원대 필로폰을 밀수입한 뒤 태국에서 도피 생활을 벌인 '아시아 마약왕' 호모(56)씨가 지난해 5월 국내로 강제 송환돼 구속 기소됐다. 사진은 A씨가 인천국제공항에서 호송되는 모습. 사진 인천지검

②던지기 수법 원조 ‘아시아 마약왕’

B에 앞서 ‘아시아 마약왕’ C(58)가 먼저 붙잡혔다. 2018년 3월 캄보디아 마약청과 한국 수사당국의 공조로 한차례 검거됐다가 캄보디아 이민국 구치소에서 도주했던 인물이다. C는 동남아 최대 한인마약조직 총책으로 사실상 ‘아시아 마약왕’으로 불렸다. 특히 마약을 특정 장소에 은닉한 후 투약자가 직접 찾아가게 하는 일명 ‘던지기’ 수법을 국내 최초로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정보기관은 C가 태국으로 잠입한 정황과 범죄 정보를 태국 마약통제청과 공유했다. 그는 2019년 12월 방콕의 은신처에서 현지 경찰에 붙잡혔다. 지난해 5월 국내로 송환된 그는 같은해 12월 1심에서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2013년 9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4년 동안 610억원 상당의 필로폰 18.3㎏을 21차례 국내에 밀반입한 혐의가 인정됐다.

[사건추적]

③20년 경력 마약 총책도 덜미

D(60)는 20년간 중국과 일본, 동남아 등지에서 활동하며 여러 차례 감옥살이를 했다. 인천지검은 2019년 8월부터 D가 캄보디아로 출국한 뒤로 태국을 오가며 다시 한국과 일본으로 대량의 필로폰을 밀반입하려 한 혐의를 포착했다. 검찰로부터 D의 인터폴 수배 사실을 통보받은 캄보디아 경찰이 이듬해 7월 프놈펜 거주지에서 체포했는데, 현장에서는 필로폰 1.4kg이 압수됐다. D는 캄보디아 교도소에 수감중이다.

2017년 6월 필리핀 사탕수수밭 살인 사건을 보도한 방송. [JTBC 방송 캡처]

2017년 6월 필리핀 사탕수수밭 살인 사건을 보도한 방송. [JTBC 방송 캡처]

④알고보니, 한국인 3명 살해 주범

지난해 10월 필리핀에서 검거된 E(43)는 한국에선 2016년 필리핀의 한 사탕수수밭에서 한국인 3명을 살해한 혐의로 복역하다 탈주한 혐의로 더 유명했다. 2017년 탈옥해 두 달 만에 붙잡혔지만 2019년 10월 또다시 탈옥했다. E가 수배 중에 마약을 국내에 대규모로 공급한 사실이 확인된 건 올해 1월 그의 국내공급 총책이 경찰에 붙잡히면서다. 텔레그램에서 ‘마약왕 전세계’라는 아이디로 광범위하게 마약을 판매해 ‘텔레그램 마약왕’으로 불렸다. E가 밀반입한 마약류는 텔레그램 아이디 ‘바티칸 킹덤’인 국내총책 F(26)가 텔레그램에서 유통채널을 운영하며 판매 광고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이들이 지난해 4월부터 12월 사이에 국내에 유통한 마약류가 필로폰 640g 등 모두 49억 상당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필리핀 은신처에서 이웃 주민의 신고로 체포된 E씨는 현재 필리핀 교도소에 수감중이다.

⑤5인방 중 마지막 검거

마지막으로 붙잡힌 A(48)는 필로폰 일부를 텔레그램을 통해 국내에 판매했다. 국내 수사기관이 A의 범죄정보를 태국 마약통제청에 넘겼고 이후 현지 경찰까지 합세해 A씨에 대한 추적이 이뤄졌다. A씨는 지난달 19일 태국에서 검거된지 일주일만인 지난달 26일 국내에 송환돼 이틀 뒤 구속됐다.

600억원대 필로폰을 국내로 밀수입한 뒤 수년간 태국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일명 '아시아 마약왕' 호모(56)씨로부터 검찰이 압수한 1kg 상당 필로폰. 사진 인천지검

600억원대 필로폰을 국내로 밀수입한 뒤 수년간 태국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일명 '아시아 마약왕' 호모(56)씨로부터 검찰이 압수한 1kg 상당 필로폰. 사진 인천지검

거물급 마약사범 5인방은 특히 필로폰이 한국에서 비싼 값에 거래된다는 점을 노려 동남아에서 밀수를 시도한 것으로 분석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거래되는 필로폰 시세는 1㎏당 5만 달러 선인데, 동남아에선 5분의 1 수준인 1㎏당 약 8000달러에 거래된다고 한다. 수사기관 관계자는 “마약류를 구하기 쉽고, 현지 인건비는 싼 데다 상대적으로 수사망에 포착될 가능성도 낮다”고 설명했다. 미얀마와 라오스, 태국 국경이 만나는 ‘골든트라이앵글’은 대규모 국제 마약조직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기도 하다. 국정원 관계자는 “동남아 국가 마약단속 당국과 견고한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등 최근 급증하고 있는 동남아발 마약 밀반입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로 도주하면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약수배범들이 설 자리는 없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현지에 수감된 다른 마약사범도 신속하게 신병을 송환받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위문희 기자 moonbrigh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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