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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 그는 과연 매국노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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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명·청 교체기의 조선 외교

1619년 3월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과 후금군의 대치 장면을 그린 ‘파진대적도’(擺陳對賊圖).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충렬록(忠烈錄)』에 실렸다. [중앙포토]

1619년 3월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과 후금군의 대치 장면을 그린 ‘파진대적도’(擺陳對賊圖).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충렬록(忠烈錄)』에 실렸다. [중앙포토]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선 사람들은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은 곧 무너진다.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세력이 커지면서 명과 조선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광해군, 중국어 능한 강홍립 발탁 #궤멸 직전 조선 군대 살리려 백기 #정묘호란 때 양국 화친에 큰 역할 #팩트 무시한 인조 신하들과 대조

본래 명의 지배를 받았던 누르하치는 1583년 군사를 일으키더니 1588년 건주여진을 통일한다. 깜짝 놀란 명은 누르하치를 견제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터졌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길을 빌려 명으로 쳐들어간다(假道入明)”고 떠벌이자 명은 조선에 대군을 보내 일본군과 맞선다. 지배자 명이 한눈을 파는 사이 누르하치는 경쟁 부족들을 제압하고 만주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누르하치에게 은인이었던 셈이다.

임진왜란 이후 명은 군사·경제적 압박을 통해 건주여진을 고사시키려고 획책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과거처럼 명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1616년(광해군 8) 후금(後金)을 건국하더니 1618년 만주의 전략 요충인 무순(撫順)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명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명은 경악했다. 후금을 응징하기 위해 원정군을 꾸리는 한편 조선도 호출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살려줬으니 원정에 동참하여 은혜를 갚으라고 요구했다. 조선의 의견은 갈렸다. 광해군과 측근 신료들은 명의 요구를 거부하려 했다. 왜란의 후유증에서 회복되지 못한 현실, 미약한 군사력, 일본의 재침략 가능성에 대한 우려 등을 거부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반면 신료들 대다수는 ‘부모의 나라’이자 ‘은인’인 명을 위해 ‘오랑캐’ 후금 정벌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광해군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명에서는 “조선을 먼저 손봐줘야 한다”는 험악한 주장까지 흘러나온다. 안팎의 압박이 가중되면서 광해군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1만3000여 명의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끼어 있는 나라’ 조선이 명청교체(明淸交替)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는 순간이었다.

‘끼어 있는 나라’ 조선의 선택

서울 신림동에 남아 있는 강홍립의 묘소. [중앙포토]

서울 신림동에 남아 있는 강홍립의 묘소. [중앙포토]

광해군은 파병군의 도원수(都元帥·사령관)에 형조참판 강홍립(姜弘立·1560∼1627)을 임명했다. 무관이 아닌 문관을 발탁한 것은 무엇보다 강홍립의 중국어 실력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강홍립은 일찍이 어전통사(御前通事)를 지냈을 정도로 중국어에 능통했다. 조선군은 만주로 진입할 경우 명군 장수 유정(劉綎)의 지휘를 받게 돼 있었다. 광해군은 유정이 조선군에게 빨리 전진하라고 닦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유정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려면 강홍립처럼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물이 필요했다. 광해군은 실제로 강홍립에게 “명군 장수의 말을 따르지만 말고 오직 전투에서 패하지 않도록 힘쓰라”고 유시했다.

1619년 2월 23일,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 본진은 압록강을 건넜다. 병사들은 열흘분의 군량을 휴대했다. 후금 수도인 흥경노성(興京老城)으로 가는 길은 험악했다. 산과 강이 널려 있었다. 25일과 26일, 눈보라까지 몰아치면서 조선군은 지쳐버린다. 행군이 늦어지자 명군 감독관 우승은(于承恩)은 “조선군이 관망하면서 전진을 회피한다”며 칼을 빼들고 빨리 전진하라고 위협했다.

만주 팔기군의 출정식을 재현한 장면. [사진 경기도박물관]

만주 팔기군의 출정식을 재현한 장면. [사진 경기도박물관]

당시 명군은 기병이 대부분이었는데 조선군은 보병 위주로 편성돼 있었다. 기병의 진군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조건에서 우승은의 협박까지 이어지자 조선군은 군량 등을 버려 짐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3월 2일 심하(深河)라는 곳에서 조선군은 600여 명의 후금군과 마주친다. 조총수들의 활약으로 물리쳤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군량이 떨어진 것이다. 허기진 장졸들은 양곡을 구하려고 주변의 여진 부락을 뒤져야 했다.

조선군은 3월 4일 부차(富車)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결국 무너진다. 앞서가던 명군이 후금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한 것이 화근이었다. 후금군이 몰려오자 강홍립은 진영을 정돈해 대응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처음에는 조총수들의 사격이 위력을 발휘했지만, 조선군 진영으로 거센 모래바람이 불면서 전세가 뒤집힌다. 후금 팔기(八旗)의 돌격에 휘말려 조선군 8000명 이상이 희생됐다. 명군이 전멸하고 조선군 대부분이 전사한 데다 군량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강홍립은 남은 병력을 살리기 위해 투항한다.

강홍립의 항복 소식에 조선 조야는 동요했다. 강홍립에게 ‘강 오랑캐(姜虜)’라는 성토가 쏟아졌다. 광해군에 대한 비판도 끓어올랐다. 당시 광해군은 이복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켰던 데다 경덕궁(慶德宮·경희궁) 등 궁궐들을 짓는데 매달려 민심을 크게 잃은 상태였다. 패전과 투항까지 더해지면서 사대부들의 반감은 극에 이르렀다. 심지어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켰던 주체들은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고의로 투항하라고 지시하고 오랑캐에게 기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명이 만주 전체를 빼앗겼다”고 매도했다. 광해군과 강홍립 때문에 명이 만주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주장이었다.

과연 그럴까? 광해군과 강홍립이 후금과의 대결을 피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619년의 사르후(薩爾滸) 원정이 실패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명군과 명 조정의 책임이었다. 일찍이 서광계(徐光啟·1562∼1633)부터 오늘날까지 이 원정을 연구했던 중국 학자들은 모두 “명군이 후금군에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명군은 병력·훈련·무기·작전·인화(人和) 등 승패를 결정하는 모든 측면에서 후금군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파적 사고와 경직성이 빚어낸 비극

청나라 초대 황제인 누르하치

청나라 초대 황제인 누르하치

강홍립은 투항 이후 8년 동안 후금에 억류됐다. 그는 포로 생활 중에도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후금의 내부 사정을 광해군에게 밀계(密啓)했다. 강홍립이 올린 정보는 광해군이 외교를 펼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됐다. 후금의 강요로 한족 여인과 결혼했던 강홍립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과 함께 조선에 들어온다. 강홍립이 인조를 알현했을 때 신료들은 ‘역적’이자 ‘매국노’를 죽이라고 아우성쳤다. 심지어 정묘호란을 ‘강로의 침략(姜虜入寇)’이라고 규정했다. 강홍립이 조선 침략을 주도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후금군 지휘부가 그를 대동한 것은 조선과의 교섭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실제로 강홍립은 당시 양국의 화친을 성사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패퇴하던 상황에서 강홍립은 조선 백성들이 후금군에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한 명군의 문제점을 분석한 서광계.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한 명군의 문제점을 분석한 서광계.

조선과의 화친이 성립되자 후금군 지휘부는 철수하면서 강홍립 부부가 조선에 남도록 허용한다. 그러자 조선 신료들은 ‘강홍립 같은 매국노가 한족 여인을 부인으로 거느리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며 강홍립의 부인을 명나라로 송환하라고 다그쳤다. 부인은 강홍립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결국 명으로 보내진다. 자신을 죽이라는 아우성, 부인과의 강제 이별에 따른 충격 때문일까. 강홍립은 곧 숨을 거둔다. 기구한 삶이었다.

그렇다면 강홍립을 ‘강로’로 매도했던 인조 정권의 신료들은 어떻게 됐을까. 주지하듯이 그들 또한 1636년 병자호란을 맞아 청에 무릎을 꿇는다. 물론 침략을 자행한 청의 책임을 가장 크게 물어야겠지만 신료들의 문제점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정적(政敵) 광해군과 강홍립에 대한 반감 때문에 객관적 ‘팩트’를 주관적으로 왜곡했던 그들의 경직성 앞에서 제대로 된 방어 대책이나 합리적인 외교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국제질서의 판이 바뀌던 17세기 초반, 조선의 비극이었다.

명·청나라 운명 가른 사르후 전투

명과 청이 교체되는 분수령이었던 1619년의 원정을 중국사에서는 ‘사르후 전역’, 한국사에서는 ‘심하 전역’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당시 명군 병력은 10만이 되지 않았고 대부분 오합지졸이었다. 무기와 장비도 형편없었다. 이 때문에 명군 장수들은 조선 조총수들을 앞다퉈 데려가려 했다. 유정이 “조선군만 믿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명군은 두송(杜松)·마림(馬林)·이여백(李如栢)·유정 등 네 명의 장수들이 지휘했는데, 두송은 공을 세우려는 욕심에 애초 합의했던 날짜를 어기고 먼저 출전했다가 사르후에서 휘하 병력을 모두 잃는다.

명군의 패전은 당시 명 내부의 심각한 정치·군사적 모순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였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