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하경 칼럼

“법복을 걸친 정치꾼” 지옥 문 앞에서 발가벗다

중앙일보

입력 2021.02.08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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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재판받는 사람의 눈에 비친 판사는 신(神)이다. 죽고 사는 것이 법대 위 절대자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판사도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존재다. 상반된 진술의 홍수 속에서 하나뿐인 진실을 확신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민사는 머리가 아프고, 형사는 가슴이 아프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거짓말하는 피고인을 미워하고 중형을 선고한다. 판사가 거짓말한다는 건 판사이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권력 눈치, 거짓 김명수 사퇴해야
대통령도 최악 사태에 원인 제공
전시 제왕적 권력에 맞선 김병로
사법부 독립과 민주주의 지켰다

그런데 사법부의 수장이 거짓말을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탄핵을 거론하면서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는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폭로가 나오자 “그런 취지의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녹취록이 공개되자 “9개월 전의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해 다르게 답변했다”며 사과했다.

녹취록에는 “지금 뭐 탄핵하자고 (여당에서)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 내가 사표 수리했다 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냐 말이야”는 발언이 나온다. 43분간 여섯 번 “탄핵”을 언급했다. 거짓말은 “희미해진 기억” 때문이 아닌 고의였다. 본인이 탄핵돼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 나라 사법은 불신의 화염에 휩싸여 있다. 가인(街人)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1948~57)의 손자인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김명수를 “법복을 걸친 정치꾼”이라고 했다. 단테는 『신곡(神曲)』에서 법률가들에게 천국을 허용했다. 다시 쓴다면 “여기로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고 적힌 지옥문 앞에 시정잡배가 된 사법부 수장을  발가벗겨 세울 것이다. 김명수는 절망한 국민의 탄식을 들어야 한다.

정의와 공정을 앞세운 인권 변호사 출신 대통령의 임기 중에 사법의 신뢰가 무너진 것은 슬픈 역설이다. 김명수는 제왕적 대통령 권력의 호위무사가 된 입법부의 눈치를 보면서 병마와 싸우는 임성근을 탄핵의 제물로 바쳤다. 그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해서도 일차적으로 사법부 내에서 책임지고 정리하지 않고  통째로 검찰 수사에 맡겼다.

이제 판사들은 법원 내·외부 권력의 의중을 모두 살펴야 하는 기막힌 처지가 됐다. 어제 박범계 법무장관의 “윤석열 패싱” 검찰 인사로 각종 권력형 비리 수사도 갈 길을 잃었다. 법원과 검찰이 한꺼번에 흔들리고 있다.

‘대법원장 거짓말 파동’의 실질적 주역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정권을 잡았지만 “포위된 요새에 갇혔다”는 친문 세력의 초현실적 강박 때문에 무리한 인적 청산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김명수와 대비되는 인물은 김병로다. 10대 후반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면암(勉菴) 최익현을 찾아가 의병에 가담했고, 항일운동가를 위한 무료 변론을 수없이 자청한 지사(志士)였다. 전쟁 중인 부산 피란시절 대법원장으로서 제왕적 대통령 권력에 맞서 사법부 독립과 삼권분립을 수호했다. 위기의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연장을 위해 1952년 직선제 개헌안을 추진했고, 반대에 앞장선 서민호 의원을 구속시켰다. 국회가 석방결의안을 냈지만 검찰은 석방을 거부했다. 부산지방법원 합의부 재판장 안윤출 수석부장판사가 결의안을 넘겨받았다. 그는 3000여 명의 관제시위대가 법원을 포위하고 “석방하면 죽인다”는 위협 속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석방명령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승만이 김병로에게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김병로는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시오”라고 의연하게 응수했다(『가인 김병로』 한인섭).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권력의 바람이 불기도 전에 납작 엎드린 김명수와는 정반대였다. 김명수는 박근혜 권력과 거래한 판사들을 적폐 세력으로 핍박할 자격을 상실했다.

문 대통령은 “정치꾼” 대신 윤관(1993~99)·이용훈(2005~2011) 전 대법원장류(類)의 올곧은 법조인에게 개혁을 맡겼어야 했다. 윤관은 영장실질심사제를 도입했다. 판사가 피의자를 직접 만나 억울한 사정을 들은 뒤 구속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하는 제도다. 검찰이 반발했지만 인신구속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는 청렴한 법관의 상징이었다. 대법원장 공관의 외관을 ‘크레마 오로’로 불리는 이탈리아산 고급 ‘라임스톤’으로 바꾼 김명수와 달랐다.

이용훈은 2005년 공판중심주의라는 법정 소통 방식을 도입했다. 판사가 기록에만 의존하지 않고 법정에서 당사자의 육성 진술을 듣고 결론을 내리게 했다. 그는 “검사들이 밀실에서 비공개 진술을 받아놓은 조서가 어떻게 공개된 법정에서 나온 진술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느냐”고 해 검찰의 반발을 샀다. 개혁적인 사법부 수장이었다.

영장실질심사제와 공판중심주의는 “힘없는 사람의 편에 서는 인권중심의 사법개혁”이었다. 어떤가. 법원과 검찰의 수뇌부를 몽땅 우리 편으로 물갈이하려는 적폐청산 푸닥거리보다는 훨씬 정의롭고 공정하지 않은가.

민심은 “법복만 입은 정치꾼”의 퇴장을 원한다. 원인을 제공한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반성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권력은 민심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하경 주필·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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