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하경 칼럼

눈먼 정치인이여 들어라 “사격중지!”

중앙일보

입력 2021.01.25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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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정치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맹렬한 불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를 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생각보다 바이든은 더 변혁적”이라며 “우리는 더 많은 정치적 무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이 달라졌다.

자영업자 손실보상·가덕도 ‘과속’
검찰총장·감사원장 마구 흔들어
바이든 정치 파괴성 경고하는데
한국은 정치가 모든 것 삼켜버려

전직 대통령들이 혹독한 징벌을 받고 있는 한국은 아직 정치적 내전 상태다. “정권 뺏기면 감옥 간다”는 경험칙이 지배하는 한 승리지상주의의 정치공학만이 신성한 경전으로 남을 것이다. 인류적 재난인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최전선에서도 정치는 맹위를 떨치고 있다.

방역으로 피해를 본 자영업자의 손실보상은 필요하다. 그러나 곳간 형편을 살펴가면서 완급을 조절해야 한다. 그런데 김용범 기재부 1차관이 “해외 유사 사례를 찾기 어렵다”고 하자 정세균 총리는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고 호통쳤다.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던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국채를 찍어 100% 지급하겠다”고 꼬리를 내렸다.

국민의힘도 “빠른 시일 내에 재원을 마련하라”고 ‘속도전’을 촉구하고 나섰다. 재정건전성을 중시해 온 보수정당답지 않다. 1년 예산이 558조원인데 불과 넉 달 동안 98조8000억원을 나눠주는 엄청난 일이 서울·부산 시장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으로 결정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주도의 가덕도 신공항 추진도 마찬가지다. 부산시장 예비후보인 김영춘 전 해수부 장관은 “첫 삽을 반드시 뜨겠다”며 호(號)를 가덕(加德)으로 지었다. 소극적이었던 김종인 위원장도 “대폭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선회했다. 표 앞에는 장사가 없다더니 이제는 입지 논란과 과잉투자 우려가 나오지 않고 있다.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전광훈, 윤석열, 그리고 이제는 최재형에게서 같은 냄새가 난다.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라 했더니 주인행세를 한다”고 했다. 전형적인 ‘태극기’ 프레임이다. 헌법기관인 감사원장에게 권력의 주구(走狗)가 되라는 것인가.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김정은의 싱가포르 선언을 “이벤트성 만남과 리얼리티 쇼”라고 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며 당시의 주역인 정의용 전 안보실장을 새 외교부 장관으로 내정했다. 정상의 결단에 의존하는 톱다운 방식의 장점도 있다. 그러나 바이든에게 이렇게 트럼프식 북·미 대화를 요청해야 하는가. 차라리 바이든과 스가 일본 총리가 원하는 한·일 관계개선을 위한 실질적 조치를 먼저 취해야 하지 않을까. 지지자가 아닌 국익을 위한 결단이 필요하다.

야당도 할 말이 없다. 김종인 위원장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향해 “별의 순간을 제대로 포착하느냐에 따라 국가를 위해 크게 기여할 수도,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정치적 중립 의무를 포기하란 말인가. 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꺼낸 이익공유제에 대해 국민의힘 대변인은 “사회주의 경제를 연상케 하는 반시장적 발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의 초과이익공유제, 박근혜 정부의 기업소득환류세제는 또 무엇인가. 잘못됐다면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압도적 위기는 하늘이 준 절호의 개혁 기회다. 국가의 목표와 방향, 시스템을 뜯어고칠 수 있다. 국민 통합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한국형 뉴딜에는 어떤 간절함도 보이지 않는다. 1930년대 대공황 위기에서 미국을 다원적 민주국가로 개조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용기와 철학을 찾아볼 수 없다.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은 황금기의 네덜란드인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를 가진 나라였다. 3만4000척의 상선을 보유했고 세계 제일의 부자 나라였다. 그러나 효종의 조선은 서양문명을 수용한 청나라가 아닌 망해 가는 명나라를 모시는 시대착오적 국가였다. 하멜 일행 36명을 13년간 억류했던 조선은 끝내 이들의 국적을 몰라서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불렀다.

이방인 하멜 일행은 효종의 어가(御駕) 행렬을 빛내 주기 위해 행진하거나 고관집 잔치의 주흥을 돋우는 광대로 소일했다. 반면에 일본은 이들이 탈출해 오자 심문을 통해 출신과 행적, 조선의 군사·교통·지리·산업·문화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단 하루 만에 얻어냈다(『다시 읽는 하멜 표류기』, 강준식).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에 일찌감치 네덜란드 상관을 열었던 일본과 꽁꽁 문을 걸어잠갔던 조선의 실력 차이였다. 깊이 잠든 조선을 노크한 근대의 빛은 허망하게 스쳐 지나갔다. 지금의 우리도 팬데믹이 준 역설적 기회를 정치과잉으로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팬데믹은 우리 모두가 지상의 모든 생명체와 상호의존적 관계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화가 난 바이러스를 잠재우려면  탐욕을 절제하고 공존의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바이든은 “우리는 정치를 제쳐두고 하나의 국가로서 이 팬데믹을 마주해야 한다”고 했다. 오직 나의 이익에 눈이 멀어 죽기살기로 싸우는 한국의 정치인들도 “사격중지(Cease fire)!”가 필요하다.

이하경 주필·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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