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될까 … 과학자 될까

중앙일보

입력

재미동포 2세 피터 김(한국명 김성배)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 과학자다. 1979년 불과 21세에 미국의 명문 코넬대(화학 전공)를 졸업했으며 6년 만인 85년 스탠퍼드대에서 생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27세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의과대학으로 진학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기초의학 연구의 메카로 알려진 MIT 부속 화이트헤드 연구소에 지원했다. 그리고 불과 3년 만인 88년 30세의 나이로 MIT의 교수가 됐다. 90년대 초 사상 최초로 에이즈 바이러스가 어떻게 세포막을 뚫고 침투하는지 그 과정을 밝혀내 에이즈 백신 개발의 초석을 다졌다. 97년 미국 최고의 과학자들만 참여하는 미국학술원 회원이 됐으며, 98년 호암상 수상으로 내한해 상금 1억원 전액을 서울대에 장학금으로 기증하기도 했다.

지난해 겨울 미국의 제약회사 머크(Merck)는 그를 연구담당 CEO로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머크가 개발 중인 모든 신약 관련 연구를 책임지는 자리다. 머크는 지난해 5백18억달러(62조원)의 매출액을 올린 초거대 기업이다. 지난해 시가총액 9백39억달러(1백12조원)로 한국의 대표적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의 두배를 웃돈다. 연봉 조건이 공개되진 않았지만 전임자가 1백60만달러의 연봉을 받았으며 스톡옵션을 합친 주식 63만주(3백억원)가 부여됐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돈방석에 올라앉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오늘날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 아메리칸 드림의 대표적 실현자로 손꼽힌다.

그가 만일 의사가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오늘날 그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의대 열풍이 한국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오죽하면 서울대 위에 의과대학이 있다는 말이 나올까. 올해 대입에서도 예외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타 학부 학생의 의대 편입을 위한 의학전문대학원도 과열 양상을 보인다.

기자는 의대 진학 열풍이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의대를 졸업한 이후의 방향이다. 많은 사람이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를 꿈꾼다. 안정적으로 돈을 잘 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재고를 요청하고 싶다. 임상의사의 입지는 날로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경쟁이다. 한의사와 치과의사를 합쳐 해마다 5천여명의 신규 인력이 배출된다. 날마다 동네 곳곳에 병.의원이 들어서고 있다. 많은 의원이 주 5일제는커녕 공휴일에도 진료한다. 이미 휴.폐업이 속출하고, 순수익 면에서 도시 근로자의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의사들이 나오고 있다.

둘째, 정부의 간섭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진료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건강보험 재정 절감을 위해 의사는 정부가 정한 표준처방의 범위 내에서 진료를 강요당한다. 자의적 처방은 여지없이 삭감당한다.

셋째, 의사들의 역할 축소다. 과거 의사들이 독점하던 일반적 의학지식은 인터넷을 통해 일반인도 쉽게 접근이 가능해지고 있다. 반면 첨단 정보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을 필두로 한 다국적 제약회사나 일부 대학병원 교수들의 전유물이다.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를 가는 것은 좋다. 그러나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의학보다 기초의학에 투신해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 내과의 약물과 외과의 수술로 대표되는 임상의학은 이미 학문적으로 발전의 여지가 거의 없는 포화상태다. 하지만 인체지놈사업과 줄기세포의 등장으로 현대의학의 뿌리는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꼭 피터 김처럼 천재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초의학 등 생명과학은 물리학과 달리 천재적 발상보다 실험실 현장을 밤새워 지키는 끈기와 섬세한 손기술에 의해 연구결과가 좌우된다. 한국인의 기질과 딱 맞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