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쓴 편지] 그레이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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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빌 이야기를 아세요? 그 슬픈 이야기를 모르시다니.

로키 산맥 끝자락에 작은 마을이 있었답니다. 느릅나무 거리 양쪽에는 집이 여덟 채쯤 있고 구스베리 밭과 사과나무 숲이 있는, 그림 같은 마을이지요. 어느 봄날 마을에 총소리가 들리고 사냥꾼에 쫓기는 사슴 같은 처녀가 들어왔어요. 바로 저 그레이스죠. 사람들은 마을의 철학자 톰의 권유에 따라 집안 일을 조금씩 도와주면 저를 안전하게 숨겨주겠다고 했죠. 저는 열심히 밭을 갈고 걷지 못하는 소녀를 돌보고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마을은 달라졌어요. 울리지 않았던 교회 오르간 소리가 들려왔고 톰은 저와 사랑에 빠졌고 앞 못 보는 아저씨는 웃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제 미소가 "빛의 프리즘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빛깔"이라면서 제가 신의 선물이라고 즐거워했지만 더욱 행복한 것은 사람들의 우정에 감동한 저였어요.

그런데 현상수배 포스터가 붙으면서 사람들은 저에게 대가를 원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일하는 시간을 두 배로 늘리는 정도였어요. 그러나 곧 남자들은 저의 몸을 만지고 잠자리를 원했죠. 아이들은 저를 놀렸고 칭송하던 사람들은 도둑년.화냥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전 참지 못하고 떠나려 했어요. 마을 밖으로 나가는 사과 트럭에 숨었지만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제 목엔 쇠바퀴가 달린 올가미가 씌워졌어요. 전 가만히 누워 제 몸을 탐하는 남자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전 사랑하는 남자 톰의 도움으로 마을 회의에서 사람들이 행한 잘못을 얘기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어요. 그날 밤 톰은 다른 남자들처럼 제 몸을 가지려 했어요. 제가 톰의 마음속의 욕심을 일깨워주자 두려움을 이길 수 없던 그는 절 쫓고 있던 갱들에게 전화를 걸어버렸죠.

그런데 사실 절 쫓던 갱은 제 아빠였어요. 아빠는 마을에서 겪은 이야기를 듣고 제 손에 총을 쥐어줬어요. 여러분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전 믿고 싶었어요. 어차피 인간들이란 결점 투성이고 악마는 아니니까요.

단지 그들은 달빛이 비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듯 함께 뭉치면 다른 거죽을 쓰는 것뿐이죠.

저의 믿음은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건 또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을까요. 자신들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을 폭력으로 유린하는, 신의 작은 은총인 권력으로 스스로를 오염시키는 나약한 사람들에게 이해와 용서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오만함이었지요.

저는 결심했어요. 그들이 작은 권력을 가지고 스스로를 파괴시킨 죄를 제가 가진 권력으로 깨닫게 하는 거죠 .저는 총으로 마을 사람들을 남김 없이 쐈어요. 도그빌은 그 뒤로 개만이 살아 남은 개마을이 되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예요.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요, 권력을 가진다는 건 진정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그것은 인간을 강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아니면 나약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아직도 알 수 없는 문제의 해답을 여러분은 가지고 계신가요.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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