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봉준호가 주목한 호주 감독의 처절한 여성 복수극 ‘나이팅게일’

중앙일보

입력

봉준호 감독이 주목할 만한 차세대 영화감독 3인에 꼽은 제니퍼 켄트 감독의 새 영화 '나이팅게일'이 오는 30일 개봉한다. [사진 제이앤씨미디어그룹]

봉준호 감독이 주목할 만한 차세대 영화감독 3인에 꼽은 제니퍼 켄트 감독의 새 영화 '나이팅게일'이 오는 30일 개봉한다. [사진 제이앤씨미디어그룹]

피멍 든 얼굴로 기절에서 깨어난 클레어(아이슬링 프란쵸시)는 자신의 곁에서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끊어진 남편을 발견한다. 갓난쟁이 딸은 바닥에 던져져 살해당했다. 클레어는 울부짖는다. 전날 밤 자신을 집단 강간하고 가족마저 학살한 영국군에 피의 보복을 맹세하며.
30일 개봉하는 영화 ‘나이팅게일’(감독 제니퍼 켄트)은 영국이 식민지시절 호주에서 자행한 끔찍한 역사를 한 여성의 처절한 복수에 되새겨낸 공포물이다. 1825년, 영국군이 흑인 토착민을 대규모 몰살한 ‘흑전쟁(Black War)’ 발발 초기 호주 태즈메이니아가 무대다. 각본‧공동 제작을 겸한 호주 감독 제니퍼 켄트(50)에 따르면 영국 정부에 의해 당시 호주 개척 사업에 강제 동원된 죄수 중엔 성별 균형을 맞추려 경범죄를 저지른 여성들도 포함됐다. 주인공은 그 중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나이팅게일’이라 불리던 아일랜드인 죄수 클레어. 형기가 한참 지나도 자신을 놔주지 않던 영국 장교 호킨스(샘 클라플린)와 그 부하들에게 강간당한 뒤 남편과 아기까지 살해당한 그는 호킨스를 쫓아 북부로 향한다. 백인들에 부족 전체를 잃은 토착민 빌리(베이컬리 거넴바르)가 그와 동행한다.

30일 개봉 공포 시대극 '나이팅게일' #영국장교에 강간당한 여성 죄수 복수극 #19세기 영국군의 호주 원주민 학살 비춰 #공포영화 '바바둑' 호주 감독 제니퍼 켄트 #봉준호, 주목해야 할 차세대 감독에 꼽아

워킹맘 호러 '바바둑' 잇는 200년 전 여성 복수극 

“나는 우리나라 역사를 수년 동안 공부했다. 이 영화에서 일어난 잔학행위를 찾는 데는 아주 짧은 시간만이 필요했다. 영화 속 이야기 자체는 허구지만, 모두 사실에 기반을 뒀고, 실제 있었던 일들은 더 나빴다.” 켄트 감독이 지난해 미국 매체 VOX에 전한 얘기다.
데뷔작 ‘바바둑’(2014)에서 행동장애 아들을 둔 현대 싱글맘의 지친 내면을 악령 들린 동화책과의 초현실적 사투에 공감가게 녹여낸 그다. 전작으로 미국 매체 ‘테이스트오브시네마’의 ‘10년간 최고의 공포영화’에 꼽혔다. 봉준호 감독은 ”‘바바둑’은 위대한 공포영화“라며 그를 아리 에스터(‘유전’), 알리 압바시(‘경계선’), 윤가은(‘우리집)과 더불어 주목해야 할 차세대 감독으로 수차례 꼽았다.

관련기사

그가 200년 전으로 눈 돌린 이번 영화 역시 단순한 시대극 이상이다. 폭력의 희생자가 겪는 내면적 살풍경은 지금의 관객에게도 호소력 짙게 다가온다. 이를 한 개인의 비극적 광기를 넘어선 시대상으로 그려낸 지점도 주목된다. 당대 다른 백인들처럼 인종차별주의자였던 클레어가 토착민 빌리의 아픔에 서서히 공감하고 연대하게 되는 여정도 설득력 있게 구현했다.
2018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여성 감독 영화론 유일하게 초청돼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화”(타임스 UK)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엿볼 수 있는) 복수의 양면성이 담긴 작품”(시카고 리더)이라 호평받으며 심사위원특별상, 신인배우상(베이컬리거넴바르)까지 2관왕에 올랐다.

영화 '헝거 게임' '러브, 로지' 등에 출연한 영국 배우 샘 클라플린이 영국 장교 호킨스 역을 맡아, 미소 뒤에 감춘 잔혹한 악행을 연기했다. [사진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 '헝거 게임' '러브, 로지' 등에 출연한 영국 배우 샘 클라플린이 영국 장교 호킨스 역을 맡아, 미소 뒤에 감춘 잔혹한 악행을 연기했다. [사진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켄트 감독이 고집한 두 가지 원칙은 정확성과 진정성이다. 클레어의 여정을 아름답게 비추고 싶지 않아 드론 사용을 자제하고 드레스, 군복 등 의상을 19세기에 사용된 염색물, 손바느질로 제작했다. 이는 클레어와 토착민 여성이 겪는 강간, 인간 사냥 피해 순간에도 적용됐다. 태즈메이니아 토착민 장로들이 제작과정에 참여해 인종차별의 역사와 사라질 위기의 토착언어를 정확히 고증한 데 더해, 감독, 배우 모두 심리학자의 자문을 받아 피해자의 감정과 트라우마를 표정 연기에 충실히 녹여냈다. 상처입고 벗은 몸을 스크린에 전시하지 않는데도 그 날 것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시드니영화제선 상영 중 30여명 극장 나가 

호주 토착민 빌리 역의 베이컬리 거넴바르는 놀랍게도 이번 영화가 연기 데뷔작이다. 실제 호주 토착민 출신으로 토착 전통 춤을 현대적으로 접목해온 댄서로 활동하다 우연히 오디션 공고를 보고 영화에 참여했다. [사진 제이앤씨미디어그룹]

호주 토착민 빌리 역의 베이컬리 거넴바르는 놀랍게도 이번 영화가 연기 데뷔작이다. 실제 호주 토착민 출신으로 토착 전통 춤을 현대적으로 접목해온 댄서로 활동하다 우연히 오디션 공고를 보고 영화에 참여했다. [사진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켄트 감독이 “폭력에 관련된 문제를 과거 속에서 풀어냄으로써, 현재의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공격받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고자 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지만, 지난해 호주 시드니영화제에서 첫 상영 당시 관객 30여명이 극단적 묘사를 이유로 극장을 뛰쳐나갔다. 켄트 감독은 “지금 이 시대에도 폭력과 그에 기반한 오만함이 세상에 만연하다”면서 무엇보다 “폭력과 복수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자문했다”고 밝혔다. 연민과 공감이야 말로 차별과 혐오에 맞설 진정한 희망이란 것이 영화에서 그가 강조한 메시지다.

배우가 성폭력 피해자 심리 공부해 연기

실제 성장 배경을 염두에 두고 캐스팅한 배우들의 열연도 몰입감을 더한다.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 영화 ‘지미스 홀’ 등에서 강인한 여성상을 연기해온 아이슬링 프란쵸시는 실제 이탈리아계 아일랜드인. 오페라 가수 경력을 가진 그는 이번 영화를 위해 10주간 켄트 감독과 사전 리허설을 하며 말타기, 장작 패기, 머스킷총 쏘기 등 육체 훈련에 더해 성폭력 피해자에 관한 심리학적 공부도 거쳤다. 빌리 역의 베이컬리 거넴바르는 실제 호주 토착민 출신 댄서로, 페이스북 오디션 공고를 보고 이번 영화로 데뷔해 베니스 신인배우상까지 차지했다.

제니퍼 켄트 감독이 주목받게 된 데뷔작 '바바둑'. 어린 아들을 홀로 키우는 싱글맘 간호사가 악령 들린 동화책과 사투를 벌이며 광기를 드러내는 과정을 빼어난 심리 묘사로 담아낸 공포 스릴러다. [사진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제니퍼 켄트 감독이 주목받게 된 데뷔작 '바바둑'. 어린 아들을 홀로 키우는 싱글맘 간호사가 악령 들린 동화책과 사투를 벌이며 광기를 드러내는 과정을 빼어난 심리 묘사로 담아낸 공포 스릴러다. [사진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관련기사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