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첩보소설 거장 존 르 카레 89세 타계

중앙일보

입력 2020.12.14 16:57

업데이트 2020.12.14 16:59

지난 12일(현지 시간) 영국 콘월에서 작고한 첩보 소설 거장 존 르 카레. 사진은 2011년 9월 자신의 동명 소설 원작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영국 시사회에 참석한 모습이다. [AP=연합뉴스]

지난 12일(현지 시간) 영국 콘월에서 작고한 첩보 소설 거장 존 르 카레. 사진은 2011년 9월 자신의 동명 소설 원작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영국 시사회에 참석한 모습이다. [AP=연합뉴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스마일리의 사람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등을 쓴 영국 정보기관 MI6 출신의 첩보소설 거장 존 르 카레가 12일(현지 시간) 89세 일기로 작고했다. BBC 등 현지 언론은 13일 소속사인 커티스 브라운 그룹 관계자 등을 인용해 르 카레가 여생을 보내던 영국 남서부 콘월에서 폐렴을 앓던 중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유족은 성명을 통해 그의 죽음이 코로나19와 관련 없다고 밝혔다.

냉전시대 영국 정보국서 활약한 요원 출신
통근열차서 첩보 경험 살린 소설 써 발표

대표작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박찬욱 첫 드라마 '리틀 드러머...' 원작자

1931년 영국 남서부 항구도시 풀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월. 20대 후반, 첩보 활동 중 소설가로 데뷔했을 당시 영국 정부가 실명 사용을 허가하지 않자 존 르 카레란 필명을 만들었다. 이후 그는 정보국 경험을 토대로 60년간 20여편의 첩보소설을 펴냈다.

아버지는 사기꾼, 어머니는 5살 때 가출 

그는 실제 삶도 소설 같았다. 아버지는 사기죄로 교도소를 드나들고, 어머니는 그가 5살 되던 해 부동산중개인과 도망쳤다. 기숙학교에서 공부에 두각을 보인 그는 스위스 베른 대학에서 독일문학을 전공하며 독일어에 능숙해졌고, 옥스퍼드대에서 현대언어학을 수학, 1956년 졸업 후엔 이튼칼리지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가르쳤다. 이 독일어 실력이 영국 비밀정보국의 관심을 끌었단다.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2012년 개봉한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왼쪽부터)주연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게리 올드먼 등의 호연과 잘 짜인 각본으로 당시 큰 호평을 받았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2012년 개봉한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왼쪽부터)주연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게리 올드먼 등의 호연과 잘 짜인 각본으로 당시 큰 호평을 받았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1959년 영국 외무부에 채용된 그는 정보부 MI6에서 냉전시대 실제 첩보활동을 펼쳤고, 국내 정보를 다루는 MI5로 이직했다. 1961년 첫 소설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집필한 게 MI5 통근 열차에서였다.

화려한 '007'과 달랐다…MI5 통근열차서 쓴 소설

소설가 이언 플레밍(1908~64)이 낳은 영국 첩보 아이콘 ‘제임스 본드’가 영국 국왕에 헌신하는 화려한 모험가였다면 르 카레의 요원들은 외롭고 번민했다. 대표작은 1963년 발표한 세 번째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다. 독일 통일 이전 이중스파이의 긴장 넘치는 첩보전에 시대와 인간에 대한 통찰을 담아 세계적 첩보소설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 소설로 영국추리작가협회가 주는 ‘골든 대거’상을 받았고, 이 상이 50주년을 맞은 2005년엔 ‘대거스 오브 대거스’에도 뽑혔다.

존 르 카레(왼쪽부터 세 번째)가 2016년, 자신의 소설이 원작인 BBC 드라마 '나이트 매니저'에 카메오로 깜짝 출연해 주연 배우 톰 히들스턴(네 번째)과 대화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 BBC One]

존 르 카레(왼쪽부터 세 번째)가 2016년, 자신의 소설이 원작인 BBC 드라마 '나이트 매니저'에 카메오로 깜짝 출연해 주연 배우 톰 히들스턴(네 번째)과 대화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 BBC One]

그의 작품들은 숱하게 스크린·안방극장으로 옮겨졌다.『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1965년 영국 출신 배우 리처드 버튼 주연 영화로 만들어졌고, 『러시아 하우스』 원작 영화엔 원조 007 배우 숀 코너리가 출연했다. 이밖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게리 올드먼, 콜린 퍼스,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명배우가 총출동해 러시아 KGB가 영국정보부에 심어놓은 첩자를 색출하는 긴박한 스릴러 영화로, 『나이트 매니저』는 톰 히들스턴 주연의 동명 BBC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박찬욱 감독 "'리틀 드러머 걸'은 노벨문학상감" 

박찬욱 감독의 첫 TV 드라마 연출작인 BBC ‘리틀 드러머 걸’도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2018년 출시 당시 인터뷰에서 “르 카레 선생의 팬으로 오래 살아왔다”고 고백한 박 감독은 “직업 스파이 세계를 비정하고 건조하게 묘사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마일리의 사람들』 등을 좋아하는데, 그와 달리 (이번 작품엔) 평범한 여성 주인공에 로맨스가 있어 처음엔 시큰둥했다. 반쯤 읽다 보니 첩보물을 넘어선 심오한 얘기였다.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걸작이었다”고 극찬했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영국 첩보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왼쪽이 주연 배우 플로렌스 퓨다.[사진 왓챠]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영국 첩보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왼쪽이 주연 배우 플로렌스 퓨다.[사진 왓챠]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냉전시대가 막 내린 후에도 르 카레는 변화하는 시대상을 기민하게 관찰했다. 미국 9‧11 사태 이후 테러와의 전쟁과 돈세탁을 다룬 『원티드 맨』은 필립 시모어 호프만 주연의 영화로도 나왔다. 2019년 나온 마지막 소설 『에이전트 러닝 인 더 필드』에선 유럽연합(EU) 탈퇴를 추진한 영국 정치인들을 정면 비판하며 브렉시트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다.
다만 집필 방식은 오직 수기만을 고집하며 “도시 생활은 사흘이 한계”라 말할 정도로 영국 콘월에서 전원생활을 즐겨왔다.

스티븐 킹 "르 카레는 문학적 거장이자 인도주의 정신가" 

미국 스릴러 제왕 스티븐 킹이 소설가 존 르 카레의 부고에 추모사를 남겼다. [스티븐 킹 트위터 캡처]

미국 스릴러 제왕 스티븐 킹이 소설가 존 르 카레의 부고에 추모사를 남겼다. [스티븐 킹 트위터 캡처]

첩보 거장의 별세 소식에 전 세계에서 애도가 날아들었다. 미국 스릴러 소설 거장 스티븐 킹은 “이 끔찍한 해는 문학적 거장이자 한 인도주의 정신마저 앗아갔다”고 14일 트위터에 애도의 글을 올렸다. 박찬욱 감독의 ‘리틀 드러머 걸’ 주연을 맡았던 영국 배우 플로렌스 퓨는 인스타그램에 ‘리틀 드라마 걸’의 프라하 촬영 막바지에 르 카레를 직접 만나 찍은 사진을 올리면서 “사망 소식에 가슴이 무겁다”며 “나는 운 좋게도 이 남자와 함께 일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우리 우정을 곱씹고 있다”고 추모했다. 영국 역사가이자 작가 사이먼 세벡 몬테피오리는 “위대한 영문학의 거인이 갔다”며 슬퍼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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