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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감독 약진, 페미니즘 대중화…코로나 속 여성 영화 눈길

중앙일보

입력

코로나19 속 156만 관객을 모으며 호평 받은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코로나19 속 156만 관객을 모으며 호평 받은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여성 영화는 흥행이 안 될 것이라는 편견을 독립영화들이 앞에서 깨고 모험을 하면서, 여성 서사도 충분히 매력 있고 갈망하는 관객이 있다는 게 증명됐죠. 상업영화까지 그 흐름이 이어졌다는 게 고무적입니다.”
올해 영화 ‘남매의 여름밤’으로 데뷔한 윤단비 감독이 16일 여성영화인모임‧한국영상자료원이 공동 주최한 ‘올해를 빛낸 여성감독들, 2020년을 말하다’ 토크에서 들려준 얘기다. 그의 말처럼, 2020년은 여성 영화가 빛난 한해였다.

16일 '올해를 빛낸 여성감독들' 토크

여성 말단사원·정치인, 관객 사로잡다

코로나19로 올 한 해 극장 관객 수가 전년 대비 73.7% 폭락한 6000만여명(영화진흥위원회 ‘2020년 한국영화산업 가결산’)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여성 서사, 여성 감독의 활약상은 오히려 돋보였다. 상업영화로는 여성 말단 사원들이 대기업 비리에 맞서는 고아성‧박해수‧이솜 주연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라미란 주연 정치 코미디 ‘정직한 후보’가 관객이 급감한 극장가에서 각각 156만‧153만 관객(이하 16일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을 동원하며 올한해 한국영화 흥행 9, 10위에 올랐다.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 한 장면. [사진 찬란]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 한 장면. [사진 찬란]

신인 여성 감독의 데뷔작도 잇따라 주목받았다. 박지완 감독의 ‘내가 죽던 날’은 배우 김혜수‧이정은의 호연이 입소문을 모았고, 3월 첫 개봉했던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지난달 재개봉한 뒤 내년 1월엔 일본 현지 개봉까지 앞뒀다.
윤단비 감독은 가족 3대의 이야기를 10대 소녀의 시선으로 그린 ‘남매의 여름밤’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감독조합상 등 4관왕에 오른 데 이어 올해 개봉 후엔 여성영화인모임이 주는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각본상을 받았다. 20대 남성에게 성폭행 당한 노인 여성의 고군분투를 그린 임선애 감독의 데뷔작 ‘69세’, 이태원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담은 강유가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이태원’도 각각 여성영화인상 감독상과 다큐상을 받은 터다. 세 명의 수상 감독은 ‘2020 여성영화인축제’ 일환으로 16일 무관객 녹화 방식으로 진행된 토크에 함께했다(토크 영상은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에서 추후 공개 예정).

신진 여성 감독 강세, 페미니즘 대중화

영화 '야구소녀'도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져온 고교 야구부에 유일한 여성 선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주목 받았다. [사진 싸이더스]

영화 '야구소녀'도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져온 고교 야구부에 유일한 여성 선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주목 받았다. [사진 싸이더스]

이날 자리에선 올해 여성 영화가 두드러진 현상의 배경도 짚었다. 특히 최근 4~5년간 이어져온 여성 영화의 ‘흐름’이 첫손에 꼽혔다. 윤가은 감독의 독립영화 ‘우리들’(2016) ‘우리집’(2019),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9)에 더해 지난해 페미니즘 논쟁 속에 360만 관객을 모은 김도영 감독의 ‘82년생 김지영’ 등이다. 윤단비 감독은 “예전엔 여성 주인공을 내세울 때 두려움이 있었는데 동시대 감독들의 작업에 영향과 응원을 받으면서 ‘남매의 여름밤’을 만들 수 있었다”고 했다. 강유가람 감독은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면서 이런 여성 서사를 소비할 수 있는 문화 향유층이 점점 늘어난 것”도 요인으로 짚었다.

여성 서사가 더욱 다양해진 것도 올해의 경향이었다. 이날 토크의 진행을 맡은 조혜영 영상예술학박사는 “올해 나온 여성 감독 영화들의 키워드는 ‘존엄’”이라 꼽으며 “작년, 재작년 영화에선 10대 성장담이 많았는데, 올해는 중년 이상 여성을 다룬 ‘욕창’ ‘찬실이는 복도 많지’ ‘프랑스 여자’ ‘내가 죽던 날’ 등 관심사와 나잇대의 스펙트럼이 확 넓어지며 깊이도 달라졌다”고 했다. 또 “‘삼진그룹토익반’ ‘콜’처럼 남성 감독 영화지만 여성 서사가 뚜렷하거나 여성 캐릭터가 강렬한 영화들도 흥행했다”고 짚었다.

코로나19 속 입소문 부른 여성 영화들

16일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올해를 빛낸 여성감독들, 2020년을 말하다’ 토크에 (왼쪽부터) 진행의 조혜영 박사, 강유가람 감독, 윤단비 감독, 임선애 감독이 방역 지침을 지킨 채 녹화를 함께했다. 이날 토크는 추후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사진 여성영화인모임]

16일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올해를 빛낸 여성감독들, 2020년을 말하다’ 토크에 (왼쪽부터) 진행의 조혜영 박사, 강유가람 감독, 윤단비 감독, 임선애 감독이 방역 지침을 지킨 채 녹화를 함께했다. 이날 토크는 추후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사진 여성영화인모임]

극장가를 점령했던 남성 중심 대자본 영화들이 코로나19로 대거 일정을 미룬 것도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로 꾸준히 개봉한 여성 영화가 도드라진 데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14일 영진위가 발표한 가결산에 따르면 극장가에 신작이 줄면서 독립·예술영화의 상영이 확대되고 장기 상영도 늘어났다. 개봉 첫 주만에 흥행 당락이 결정됐던 예년과 달리 입소문을 타며 뒤늦게 찾는 관객도 생겼다. 허남웅 영화평론가는 “여성 서사에 대한 움직임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올해 큰 영화들이 기대만큼 관심을 못 받고 개봉 예정작들이 빠지면서 반사이익처럼 눈에 더욱 띄게 됐다”면서 다만 “여전히 올해 흥행 1~3위는 ‘남산의 부장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반도’ 등 기존에 성공했던 남성 영화들이다. 시장에서 크게 성공할 만한 유형의 영화들을 어떻게 여성 서사와 접목해나가느냐가 중요할 것”이라 전망했다.

임선애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 '69세'(20일 개봉)는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간 69세 효정(예수정)이 29세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치욕적인 일을 당한 후 냉혹한 현실 속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용기 내는 여정을 그렸다. [사진 엣나인필름]

임선애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 '69세'(20일 개봉)는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간 69세 효정(예수정)이 29세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치욕적인 일을 당한 후 냉혹한 현실 속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용기 내는 여정을 그렸다. [사진 엣나인필름]

한편, 매해 주목할 만한 여성영화인들을 조명하는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은 21회째를 맞은 올해 최고상 수상자로 서울독립영화제 김동현 집행위원장을 선정했다. ‘삼진그룹영어토익반’은 박은경 대표가 제작자상, 배정윤 미술감독이 기술상을, ‘69세’는 임선애 감독의 감독상에 더해 예수정 배우의 연기상까지 각기 2관왕을 차지했다. 신인연기상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강말금 배우, 홍보마케팅상은 ‘결백’의 홍보사 머리꽃에 돌아갔다.

'2020 여성영화인축제'의 대상격인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에는 (위 왼쪽부터) 서울독립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김동현 집행위원장, 제작자상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박은경 대표, 감독상에 '69세' 임선애 감독, 각본상에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감독이 선정되었다. (아래 왼쪽부터) 연기상에는 '69세' 예수정 배우, 신인 연기상에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강말금 배우, 다큐멘터리상에 '이태원' 강유가람 감독, 기술상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배정윤 미술감독, 홍보마케팅상에 '결백' 머리꽃이 수상했다. [사진 여성영화인모임]

'2020 여성영화인축제'의 대상격인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에는 (위 왼쪽부터) 서울독립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김동현 집행위원장, 제작자상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박은경 대표, 감독상에 '69세' 임선애 감독, 각본상에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감독이 선정되었다. (아래 왼쪽부터) 연기상에는 '69세' 예수정 배우, 신인 연기상에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강말금 배우, 다큐멘터리상에 '이태원' 강유가람 감독, 기술상에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배정윤 미술감독, 홍보마케팅상에 '결백' 머리꽃이 수상했다. [사진 여성영화인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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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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