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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화사건 '분지' 소설가 남정현 87세 별세

중앙일보

입력

1967년 소설 '분지'의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소설가 남정현씨. [중앙포토]

1967년 소설 '분지'의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소설가 남정현씨. [중앙포토]

대표작 ‘분지’로 필화 사건을 겪은 소설가 남정현이 21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193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대전사범대학을 나와 교사생활을 하다 지병인 결핵 치료를 위해 그만두고 소설 습작을 했다. 1958년 단편 ‘경고구역’, 이듬해 ‘굴뚝 밑의 유산’이 문예지 ‘자유문학’에 추천을 받으며 등단했다.

1965년 3월 ‘현대문학’에 ‘분지’를 발표하며 필화 사건을 겪었다. 이 소설은 홍길동의 후예를 자처하는 주인공 홍만수가 광복 후 어머니가 미군에 겁간당한 충격으로 죽고, 누이동생마저 미군 상사와 동거하며 학대를 당하자 그 미군의 아내를 겁탈한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가 광복 후에도 외세에 의해 사실상 식민지화됐다는 시각을 풍자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같은 해 5월 이 소설이 북한 조선노동당기관지 ‘조국통일’에 실리면서 고인은 반공법에 의거해 공안당국에 체포됐고 이듬해 정식 기소돼 실형을 받았다. 변호사들의 무료 변론, 안수길‧이어령 등 동료 문인들의 구명 증언이 잇따르며 67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고인은 1974년에도 민청학련 사건 및 문인 간첩단 사건 등에 연루돼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5개월가량 다시 복역했다. 이후로도 민족문학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전신) 고문,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등을 지내며, 미국 대통령 방한 반대, 이라크 파병 반대 등 반미 성향 활동을 해왔다.

주요 작품은 ‘분지’ 외에도 1961년 동인문학상을 받은 중편 ‘너는 뭐냐’, 일제 순사 출신 주인공을 통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비정상적 세태를 풍자한 ‘허허선생’, 장편 ‘사랑하는 소리’ 등이 있다. 2002년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주는 제12회 민족예술상을 받았다. 같은 해 국학자료원에서 '남정현문학전집'(전 3권)을 발간했고 2004년에 실천문학에서 '남정현 대표소설선집'을 펴냈다. 고인은 당시 작가의 말에서 “일본 시대에 태어나서 철없는 소년기를 철없이 흘려보내다가 부득불 또 분단 시대, 아니 미국 시대를 살게 되었다"면서 "미국 시대가 아닌 우리 시대를 한번 살아보고 싶은 소망에 항시 우리 시대에 대한 간절한 비원을 안고 무작정 소위 그 글을 쓰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남겼다.

고인의 장례는 한국소설가협회가 문인장으로 치른다. 유족은 아들 돈희, 딸 진희씨 등이다. 빈소는 혜화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3일.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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