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마킹 한 번에 날아간 1년…"제가 정말 부정행위자인가요?"

중앙일보

입력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3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고등학교 고사장에서 한 수험생이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뉴스1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3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고등학교 고사장에서 한 수험생이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뉴스1

"아이가 그때 차라리 정직하게 손을 들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라고 후회합니다. 한 번의 실수로 모든 시험을 무효로 만드는 게 정의입니까?" (수험생 박 모 씨의 아버지)

지난 3일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치러진 후 사소한 이유로 성적이 무효가 될 위기인 수험생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허술한 시험 감독으로 피해를 본 학생도 있지만, 구제책은 전무하다.

마킹 실수 곧바로 보고했는데…'부정행위' 결론 낸 교육부

지난 3일 오전 서울 중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시험실에 들어간 수험생이 막바지 공부를 하고 있다. 뉴스1

지난 3일 오전 서울 중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시험실에 들어간 수험생이 막바지 공부를 하고 있다. 뉴스1

재수생 박 모(19) 씨는 며칠 전 지역 교육지원청을 통해 올해 수능 성적이 무효가 될 거라는 통보를 받았다. 교육부에서 박씨가 시험 중 부정행위를 했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1년여의 수험생활이 수포가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운명을 가른 건 단 한 번 그은 수정테이프였다. 지난 3일 박씨는 수능 4교시 탐구영역 때 첫 선택과목인 한국지리를 마치고 제2 선택과목인 세계지리를 풀었다. 시험을 10분 만에 푼 박씨는 답을 점검하다 한 문제를 수정하기 위해 수정테이프를 들었다. 아직 세계지리 답안지를 적지 않았던 박씨는 실수로 한국지리 답안지에 수정테이프를 그었다.

순간 실수를 알아챈 박씨는 감독관을 향해 손을 들었다. 수정테이프 위에 다시 마킹하거나, 답안지를 교체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박씨는 "시험실에서 감독관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시험을 보고 본부에서 처리하자며 남은 시험을 보게 했다"고 말했다.

-2020학년도 4교시 한국사/탐구영역 OMR답안지. 3개 과목이 한 답안지에 있다. 시험 종료 후 다른 과목의 답안지를 수정하면 모든 시험이 0점 처리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2020학년도 4교시 한국사/탐구영역 OMR답안지. 3개 과목이 한 답안지에 있다. 시험 종료 후 다른 과목의 답안지를 수정하면 모든 시험이 0점 처리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하지만 시험 후 감독 본부로 가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박씨는 "본부에 가자 교감이 두 번째 선택과목 시간에 이전에 쓴 답안지를 건드렸는지 다그치며 물었다"고 말했다. 이어 교감은 상황실에 박씨가 답안지를 수정했다고 보고했다. 박씨의 실수가 '부정행위'로 보고된 순간이었다.

박씨는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수정한 자리에 몰래 마킹을 했어도 누구도 모를 상황이었다"면서 "공정하게 판단해줄거라 믿고 정직하게 그 자리에서 손을 들었다. 수정테이프를 그어서 이득을 볼 게 뭐가 있었냐"고 말했다.

교육부에서 박씨의 행위를 부정행위로 결론지었다는 소식을 들은 박씨는 행정심판과 이의제기를 준비하고 있다. 박씨는 "나는 부정행위자가 아니라 4교시 3과목(한국사와 제1·2선택과목)의 답지를 하나로 만든 행정편의주의의 희생양"이라고 말했다.

"교실 5번 드나 들어도 손 놓은 감독관…1년 누가 보상해주나"

지난 3일 오전 서울 중구의 한 고등학교 앞에서 수험생 부모들이 교실로 향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뉴스1

지난 3일 오전 서울 중구의 한 고등학교 앞에서 수험생 부모들이 교실로 향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뉴스1

허술한 감독 때문에 수능 시험을 망친 사례도 있다.

지난 3일 경기 수원시의 권선고등학교에서 수능을 본 재수생 손모(19)씨는 앞자리 A학생의 돌발 행동 때문에 시험에 집중할 수 없었다. 3교시 수학이 끝나기 10분 전 호흡 곤란을 호소한 A학생은 보건실로 옮겨졌다. 초고난도의 '킬러 문항'을 풀던 손씨의 집중력은 이때부터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4교시에 자리로 돌아온 A학생의 돌발 행동은 계속됐다. 창문을 연 A학생은 창틀에 매달린 데 이어 5번이나 자리를 벗어나 교실 안팎을 드나 들었다. 통제되지 않는 A학생의 행동에 손씨는 집중력을 완전히 잃었고, 재수까지 하며 준비한 시험을 망쳤다.

손씨는 경기도교육청에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경기도교육청 측은 서면으로 'A학생의 돌발행동을 강하게 제지하면 다른 수험생에게 피해가 갈까 봐 우려돼 제지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경기도교육청은 감독관의 고의적 실수나 메뉴얼 위반이 없었다며 책임도 물을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손씨의 어머니는 "호흡이 곤란한 학생이 있었다면, 따로 마련된 별도고사장에서 시험을 보게 해 20명이 넘는 학생의 피해를 막아야 했다"며 "감독 소홀로 다시 1년을 날리게 된 아이의 시간은 누가 보상해주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육부 "4교시 답안지 분리하면 채점 오래 걸려"

성기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3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브리핑실에서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방향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성기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3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브리핑실에서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방향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수능 때마다 억울한 피해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교육부는 제도 개선에 신중한 입장이다. 가장 많은 문제가 생기는 4교시 답안지 작성 문제도 매년 반복된다. 수험생들은 여러 과목의 답지를 OMR 카드 한 장으로 만든 게 문제의 원인이라며 개선을 요구한다.

하지만 교육부의 입장은 완고하다. 지난 3일 교육부 관계자는 브리핑에서 "답안지를 3장으로 분리하면 채점 기간이 5일은 늘어난다"며 난색을 보였다. 이어 "2022학년도 수능 때부터는 단순 마킹 실수는 부정행위로 보지 않는 걸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감독 피해에 대한 구제책도 마땅치 않다. 지난 3일 서울 강서구 덕원여고에서는 방송 담당 교사의 마우스 조작 실수로 4교시가 끝나기 2분 전에 종료령이 울렸다. 이후 지역 교육지원청은 교사의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별다른 구제책을 내놓지 않았다.

남궁민 기자 namgung.mi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