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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잃은 경제정책 방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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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조현숙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1년에 두 번 기획재정부 관료와 출입기자가 한마음 한뜻이 되는 때가 있다. 경제정책방향 발표를 앞두고서다.

“경제정책방향 없애야 한다고 기사 좀 써달라.”(관료 A)

“그런 기사가 나온 지가 수년째다. 왜 못 없애나.”(기자)

얼마 전 실제로 오간 대화다. 물론 해마다 이맘때면 반복하는 얘기다.

경제정책방향. 줄여 ‘경방’ 또는 ‘경정’이라고도 부른다. 경제정책을 이런 방향으로 꾸려가겠다고 경제부처가 합동으로 발표하는 걸 말한다. 경제·산업과 관련한 모든 정책을 망라한다. 수립과 발표는 경제부처에 가장 큰 연중행사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공무원 입장에선 없는 내용까지 짜내야 해서 힘들고, 언론은 언론대로 ‘알맹이 없이 재탕·삼탕’이라고 매번 비판하기 지쳐서다.

노트북을 열며 12/17

노트북을 열며 12/17

원래는 이렇게 천대받는 처지가 아니었다.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봤을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출발이다. ‘중공업을 키우고 수출을 늘려라’ ‘어떤 작물로 농업 소득을 불려라’는 식의 계획이 가진 위력은 막강했다. 이후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전두환·노태우 정부), 신경제 5개년 계획(김영삼 정부)으로 이어졌다.

5개년 계획의 틀을 깬 건 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다. 무리한 장기 계획이 위기를 불러왔고, 급변하는 경제 상황에도 맞지 않다는 비판이 일었다. 김대중 정부 들어 경제운용방향 또는 경제정책방향이란 이름으로 연간·하반기 계획을 1년 두 번 발표하는 지금의 형태가 자리잡았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렀다.

이제 경제정책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순발력이다. 1년 전 이름도 없던 병이 전 세계 경제를 마비시키고, 11개월 만에 이 병을 막아낼 백신이 만들어지는 세상이다. 예산도 한 해 다섯 번 짜는 시대(올해 본예산에 추가경정예산 4차례) 아닌가.

정부가 연중 계획을 세우고 방향을 정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한다고 바뀔 경제도 아니다. 국내 64개 대기업 그룹의 지난해 매출만 1402조원에 달한다. 그해 정부 예산(475조원)의 3배에 육박한다.

경제정책 수립의 주도권마저 국회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내년 초 가장 ‘핫한’ 정책인 3차 긴급 재난지원금만 해도 논의 시작부터 확정까지 여·야가 주도했다. 논의 과정에서 정부는 제 목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유효기간이 다한 경제정책방향을 여태 붙잡고 있는 상황이 정부의 현실을 보여준다. 순발력이 높아지도록 정책 수립의 틀을 어떻게 새로 짤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보단 말이다. 내년에도 “경방 없애란 기사 써달라” “왜 못 없애나”란 대화를 서로 반복할 수밖에.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