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까치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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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앞마당의 단감나무 두 그루, 서로 바라만 보며 줄잡아 35년을 살았습니다. 지겹다고 외면하지도, 좋다고 덥석 껴안지도 않았지요. 한 하늘 아래 눈비를 맞고 바람을 맞으며 꽃을 피우고 그늘을 키웠습니다. 아주 조금씩 가지와 싹을 내밀며 다가서는 동안 그만큼 깊고 넓고 높아졌습니다.

두 그루 감나무 동반자. 그대도 누군가의 도반(道伴)이 되어 저리도 한결 같은지 묻고 싶습니다. 뼈아픈 반성이지만, 돌아보면 저 감나무만도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무한질주의 욕망과 무한경쟁의 회오리에 휘말려 나는 내가 아니고, 또한 나는 너도 아니었지요. 그러는 사이 자꾸 목이 마르고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몸 속에 깊은 병이 또아리를 틀었습니다.

오늘은 장대로 단감을 따려다 개똥지빠귀 우는 소리에 그만 두었습니다. 격년결과(隔年結果)의 해거리로 많이 달리지도 않았지만, 태풍 '매미'에 그마저 떨어지고 말았지요. 한 접이나 될까 말까. 하나를 따서 맛만 보고, 그대로 까치밥이 되기를 바랄 뿐. 김남주 시인은 까치밥을 '조선의 마음'이라 했지요. 두 그루 감나무가 환한 등불을 내걸었습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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