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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인생사용설명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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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채혜선 기자 중앙일보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지난 8월 그룹 방탄소년단(BTS) 팬 커뮤니티 ‘위버스’에 멤버 뷔(24·본명 김태형)는 이런 글을 올렸다. “아직 꿈이 없거나 원하는 직업이 없으면 추천해 드립니다. 꿈을 찾고 싶은 아미는 글을 올려주시지요.”

취미 등을 적는 게 조건이었다. 뷔가 몇몇 팬의 글을 보고 직접 댓글을 달면서 해당 글엔 15일 기준 2만 명 넘는 ‘아미(BTS 팬덤)’가 글을 남겼다. 뷔는 이제 더는 직업을 추천해주지 않지만, 이 글엔 여전히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 아미가 많다.

대부분 영어로 달린 답글을 살펴보면 전 세계 아미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걸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 듯하다. 꿈에 막힘이 없다. “제 취미는 노래 부르기입니다. 나중에 의사가 되고 싶어요.(My hobby is singing. My dream is to become a doctor)”와 같은 식이다.

반면 한글로 적힌 답글은 달랐다.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 꿈이 없다고들 했다. “제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걸 모르는데 언젠간 꿈이 생길 수 있을까요?”

지난 9월 16일 오전 대구 수성구 정화여고에서 학생들이 9월 모의평가를 치르고 있다. [뉴스1]

지난 9월 16일 오전 대구 수성구 정화여고에서 학생들이 9월 모의평가를 치르고 있다. [뉴스1]

전부 한국 10대들의 글이다. 글을 쭉 보다 서른 살이 훌쩍 넘은 나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쉽게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퍼뜩 알아버렸다. 우리가 높은 성적만이 꿈인 줄 알고 자라온 탓 아니겠냐는 서글픈 유대감이 생겨버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시하게 늙을 순 없다. 내가 무엇을 할 때 좋고 싫은지 이제라도 알아야겠다. 막막해 보이는 이 여정에 대한 힌트는 이슬아 작가의 신간 『부지런한 사랑』에서 찾을 수 있었다. 10대를 대상으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이 작가는 아이들에게 나 또는 남을 위한 ‘인생사용설명서’를 써보게 했다.

열 살 A는 이렇게 적었다. 만화 ‘드래곤볼’은 꼭 볼 것, 초밥과 ‘불닭볶음면’은 먹어볼 것, 바다가 아름다운 괌에 가볼 것, 놀 시간이 많아지니 밤은 꼴딱 새 볼 것…. 그의 글은 이렇게 끝난다. “내가 말한 것을 하면 인생이 행복해질 거야. 행복이란 네가 원하는 것을 하는 거야.”

A는 글을 쓰면서 자신이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렸을 거다. 켜켜이 모인 이런 기억들은 원하는 걸 하면 된다는 결론으로 A를 이끌었다. 이처럼 인생사용설명서를 쓰는 건 나를 탐구하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걸 할 때 행복한지 알게 한다. ‘이불킥’으로 남았던 부끄러운 과거도 여기선 내일의 현명한 나를 만든다.

인생의 답을 찾은 A는 분명 반짝반짝 빛나는 어른으로 클 것이다. 나도,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당신도 늦지 않았다. 오늘부터 인생사용설명서를 한줄씩 채워가는 건 어떨까. 생각만이라도 좋다. 그렇게 나와 당신은 조금씩 행복해질 것이다.

채혜선 사회2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