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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0번 무한대 가능성, 현실로 만들어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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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농구 원주 DB의 이상범(왼쪽) 감독과 일본인 가드 타이치가 서로를 보며 웃고 있다. 박린 기자

프로농구 원주 DB의 이상범(왼쪽) 감독과 일본인 가드 타이치가 서로를 보며 웃고 있다. 박린 기자

“6년 전, 감독님 첫인상요? 분위기 잡고 엄격했어요.”(타이치)
“야~ 일본에서는 장난도 치고 편하게 대해줬지. 한국 와서 달라진거지.”(이상범)

프로농구 DB 일본인 타이치·이상범 감독 #오호리고교 인연, 6년 후 한국서 재회 #감독 믿고 한국행, 가드로 포지션 변경 #유재학 "KBL 톱레벨 가드 성장 가능성"

최근 원주종합체육관에서 만난 프로농구 원주 DB 일본인 가드 나카무라 타이치(23)와 이상범(51) 감독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2014년 이 감독이 후쿠오카 오호리 고등학교 인스트럭터를 맡았을 당시, 고2였던 타이치와 첫 인연을 맺었다. 6년이 흘러 타이치는 이 감독 밑에서 한국프로농구 1호 일본선수로 뛰고 있다.

이 감독은 “선배 소개로 오호리고에서 농구 클리닉을 했다. 며칠만 봐주려했는데, 정이 들어 두 달 넘게 있었고 시간이 되면 매해 찾아갔다”고 회상했다. 당시 오호리고에는 농구 전문 코치가 없었다. 타이치는 호세이 대학에서도 법학을 전공하며 수업과 농구를 병행했다. 방학 땐 자비로 비행기값을 내고 원주로 와서, 이 감독이 이끄는 DB와 훈련을 함께 했다. 이 감독은 2018년과 20년 DB를 정규리그 1위로 이끈 전술가다.

대학 1학년까지 포워드로 뛰었던 타이치는 이 감독의 뜻을 받아들여 가드로 포지션을 바꿨다. “포워드는 슛을 빵빵 쏴야하는데, 타이치는 오히려 드리블링과 패스센스가 나쁘지 않았다. 키 큰 가드(1m90㎝)로 경쟁력 있다고 판단했다”는게 이 감독의 설명이다.

일본 대학 대표 시절 타이치(왼쪽 둘째)와 이상범 감독(가운데). [사진 DB]

일본 대학 대표 시절 타이치(왼쪽 둘째)와 이상범 감독(가운데). [사진 DB]

타이치는 지난 시즌 일본프로농구 B리그 교토 한나리즈에서 41경기를 뛰었다. 연봉 1200만엔(1억3600만원)을 제시 받았으나, 1/3 수준인 5000만원을 받고 한국행을 택했다. 올 시즌부터 KBL에 아시아쿼터가 도입됐고, 무엇보다도 이 감독이 있어서다. 타이치는 “이상(이 감독) 덕분에 내 농구인생이 바뀌었다는 믿음이 있다. 돈보다는 감독님 밑에서 농구의 폭을 더 넓히고 싶었다”고 했다.

타이치는 9일 데뷔전이었던 삼성전에서 8점·3어시스트를 올렸다. 5경기 평균 5.2점·2.2어시스트를 기록 중이다. 쉬운 슛을 놓치고, 볼을 끄는 등 등 아직은 임팩트가 부족하다. 인터뷰 전날 호되게 혼났는지 풀이 죽어있었다.

이 감독은 “대학 시절 전문 코치가 없었다. 누가 지적해주지 않으니 정체되고 후퇴했다. 한일 농구는 전혀 다르며 이제 새로 시작이다. 전 이 친구를 일본인이라 생각하지 않고 한국선수와 똑같이 대하고 혼낸다. 같은 제자인데 국적을 따질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어 이 감독은 “타이치가 패스 미스가 많다는 지적을 받지만, 난 실수하더라도 피하지 말고 부딪히라고 한다.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고칠게 없고 제자리”라고 했다. 일본어 통역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들은 타이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농구 DB의 일본인 가드 타이치. [사진 KBL]

프로농구 DB의 일본인 가드 타이치. [사진 KBL]

DB 가드 두경민(29)이 타이치를 많이 돕는다. 타이치는 “훌륭한 가드인 경민이 형이 ‘난 프로 1~3년차 때 후회가 많았는데, 후회 남기지 않는 플레이를 하라’고 조언해준다”고 했다. 이 감독은 “타이치가 도와주면 본인이 쉴 수 있어 가르치나보다”고 농담한 뒤 “얘가 살아야 팀이 산다. 부상자가 속출하는데, 장기레이스는 식스맨이 좌우한다”고 했다.

유재학 울산 현대모비스 감독은 “두루두루 잘하는 타이치는 KBL 톱레벨 가드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 감독은 “일본 국가대표 2진에 뽑혔던 타이치한테는 ‘가능성’이란 단어가 따라다닌다. 유 감독님도 가능성이 있다고 본거다. 근데 가능성은 말그대로 가능성이다. 현실화 시키지 못하면 얘는 끝나는 것”이라고 했다. 타이치는 “톱레벨 선수가 되려면 희생을 많이하고 죽을 정도로 노력해야한다”고 했다.

이 감독은 “젊은 나이에 놀고도 싶고 일본에서도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바다를 건너왔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겠다는 열정이 있으니 어떤 훈련도 극복할 수 있을거다. 함께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 3년 내 도달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내가 오호리고교에서 가르쳤던 타이치 동기 2명이 일본 프로에서 뛴다. 타이치가 걔네보다는 잘해야지, 내가 창피하잖아”라며 웃었다.

타이치는 등번호를 무한한 가능성을 뜻하는 0번을 택했다. 타이치는 “0부터 시작해 한단계씩 올라가겠다”고 했다. 일본프로에서 뛰었던 타이치는 국내 신인상 자격은 없다. 타이치가 “타이틀은 실력을 키우면 따라오는 것”이라고 하자, 이 감독은 “나중에 MVP 받으면 되지”라며 어깨를 툭 쳤다.

프로농구 DB 이상범 감독과 타이치. 박린 기자

프로농구 DB 이상범 감독과 타이치. 박린 기자

원주=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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