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국문학 최유찬 교수 "컴퓨터 게임 적당히 즐기면 힘이 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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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면 독(毒)이 되지만 적당한 게임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힘을 줍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인 순발력.동시지각력 등을 키울 수 있거든요."

첫인사후 바로 "무슨 게임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연세대 최유찬(51.국문학)교수. 그는 빙긋 웃으며 연구실 컴퓨터 뒤켠을 가리켰다. 그곳엔 '스타크래프트','삼국지''파이널판타지''디아블로' 등 내로라 하는 게임CD 1백여장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최교수가 게임광이 된 것은 10여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아들이 집의 286 컴퓨터에 깔아놓은 '삼국지Ⅱ'를 본 뒤 곧바로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잠자는 것, 밥먹는 것도 잊었습니다. 자리를 펴고 누워도 게임에 나오는 중국 지도가 천장에 어른어른 하더구먼요.하지만, 삶의 역경을 여러번 헤쳐나온 경험이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었지요"

"1996년 초 교수가 되고도 한동안 게임에 미쳐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학회에서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됐어요. 논문을 쓰려니 책을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죠. 원고지 3만장 분량의 책을 읽다보니 부분 부분에만 정신이 팔려 전체적인 맥이 짚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평소 즐기는 '삼국지' 게임을 떠올리자 불현듯 방대한 소설이 하나의 이미지로 정리됐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삼국지' 게임을 할 때는 눈을 감아도 중국을 41개주로 나눠놓은 지도가 선명하게 떠오르더군요. 각 주의 지형.인물.역사도 함께요. '토지'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술처럼 각각의 부분과 전체가 동시에 지도처럼 그려지더라 이겁니다."

최 교수는 요즘 인기 있는 '스타크래프트'나 '디아블로Ⅱ' 같은 게임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이들 게임에선 전체 지도와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상세한 지도가 화면에 함께 나온다. 이 두 화면을 동시에 보는 훈련을 끊임없이 하지 않고선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그는 그해 이같은 경험을 담아 '토지를 읽는다'(솔)는 책을 펴냈다. 게임에만 빠져 있던 그는 이후 본업인 '연구'로 돌아갔다. 단순한 '게임 중독자'에서 '게임을 연구하는 국문학자'로 바뀐 것이다.

"지나치면 독(毒)이 되지만 적당한 게임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힘을 줍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인 순발력.동시지각력 등을 키울 수 있거든요."

그는 강의시간에도 게임을 종종 예로 든다. 예컨대 소설과 시(詩)의 차이를 설명할 때 "복잡한 서사 구조를 가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 소설이라면 삶의 중요한 순간만을 포착해 모아놓은 격투기 게임은 시"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최교수는 컴퓨터 게임이 우리의 전통놀이와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농악이나 탈춤에서 굿판을 벌이는 것은 놀이패들이지만, 흥이 오르면 무대의 중앙은 관중이 차지한다. 게임도 제작자가 판을 벌여 놓지만 주인공은 사용자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 놀이문화가 멈춰야 할 시점을 잘 아는 것처럼 게임도 자제할 줄 알아야 진정한 게이머"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최근 '컴퓨터 게임의 이해'(문화과학사)라는 책을 냈다. 2년반 동안 연구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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