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8도로 버디·버디, 54도로 이글…‘칩샷의 여왕’ 이미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6면

18번 홀에서 진행된 연장전. 이미림이 그린 뒤쪽 파란색 펜스 근처에서 칩샷을 하고 있다. 이어 버디에 성공, 우승했다. [USA 투데이=연합뉴스]

18번 홀에서 진행된 연장전. 이미림이 그린 뒤쪽 파란색 펜스 근처에서 칩샷을 하고 있다. 이어 버디에 성공, 우승했다. [USA 투데이=연합뉴스]

“전에 하루 두 번 칩샷을 넣은 적은 있는데, 세 번은 없었어요. 믿기지 않아요.”

메이저 ANA 인스퍼레이션 우승 #최종 4라운드서 기적의 샷 #관중석 대신 세운 펜스 덕도 봐 #부상 이겨내고 통산 4승 달성

14일(한국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란초 미라지의 미션 힐스 골프장에서 끝난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 대회 ANA 인스퍼레이션 우승자 이미림(30)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환상적인 칩샷을 성공시켰다. 마지막 홀 칩인 이글로 합계 15언더파 공동 선두로 올라섰다. 연장 첫 홀에서 넬리 코다(미국), 브룩 헨더슨(캐나다)을 따돌리고 우승했다. 그는 한국 선수로는 여섯 번째 ANA 인스퍼레이션 우승자가 됐다. 우승 상금은 5억5000만원.  LPGA 통산 4승이 됐다.

펜스에 맞고 나오는 두번째 샷. [사진 JTBC골프 중계화면 캡처]

펜스에 맞고 나오는 두번째 샷. [사진 JTBC골프 중계화면 캡처]

이 대회 우승자는 18번 홀 그린 옆 호수에 뛰어들어 ‘호수의 여인’으로 불린다. 이미림은 그보다 ‘칩샷의 여왕’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2번 홀(파5)에서 첫 버디를 기록한 그는 6번 홀(파4) 그린 주변 오르막에서 칩샷으로 공을 홀에 넣으며 분위기를 탔다. 칩샷의 여인 드라마의 서막이었다. 16번 홀(파4)에선 27m에서 칩샷을 시도했고, 공은 또 한 번 홀로 빨려 들어갔다.

이미림은 17번 홀 보기로 두 타 차로 밀렸다. 우승과 거리가 멀어지는 듯했는데, 이미림은 18번 홀(파5)에서 또 한 번 기적을 연출했다. 그린 너머에서 내리막 칩샷을 시도했다. 공은 또다시 깃대를 맞고 홀 안으로 들어가며 이글이 됐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은 그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2014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LPAG 투어 레인우드 클래식에서 바위 위의 공을 웨지로 쳐 극적인 파세이브로 우승한 적도 있다.

이미림은 타이틀리스트 보키 디자인 SM8 50도와 54도, 58도 RAW 웨지를 쓴다. RAW는 마감 코팅을 안 한 제품으로, 녹이 잘 슬지만, 스핀이 잘 걸린다. 6번 홀과 16번 홀에서는 58도를 썼고, 18번 홀에서는 54도를 썼다. 18번 홀에선 두 타 뒤져 꼭 이글을 해야 했기에 공을 띄워 붙이는 대신 충분히 굴리려고 했다. 칩샷도 퍼트처럼 많이 구르면 아무래도 홀에 들어갈 가능성이 커진다. 처음에는 퍼트로 샷을 하려다가 마음을 바꿔 웨지를 썼다. 이날 두 번이나 칩샷을 홀에 넣어 자신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미림은 길고 똑바로 나가는 드라이브샷이 장기다. 그런데 최근 2년 넘게 드라이브샷과 아이언샷이 좋지 않았다. 그린을 놓칠 때가 많아 칩샷 연습을 많이 했는데, 효과를 본 셈이다. 18번 홀 그린 뒤에 설치된 펜스도 그를 도왔다. 미션 힐스 골프장 18번 홀은 아일랜드 홀이다. 짧아도 물에 빠지고 그린을 넘어가도 내리막이라 물에 들어간다. 박세리도 2007년 이 대회에서 2온을 노리고 우드로 샷을 했는데, 공이 그린을 넘어가 물에 빠졌고 우승을 놓쳤다.

대회 전통에 따라 18번 홀 옆 호수로 뛰어드는 이미림. [AFP=연합뉴스]

대회 전통에 따라 18번 홀 옆 호수로 뛰어드는 이미림. [AFP=연합뉴스]

원래 18번 홀 그린 뒤에는 VIP 관중석이 있었다. 그린을 절반 정도 가리는데, 그린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관중석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가는 공은 물로 들어갔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관중이 없었고, 따라서 관중석도 없앴다. 대신 대회 조직위는 그린 뒤를 완전히 막을 정도로 펜스를 늘렸다. 게다가 펜스를 그린에 가깝게 붙여놨다. 스폰서인 ANA를 배려하기 위한 것으로, 로고가 붙어 있다.

펜스를 믿은 선수들은 2온을 노리고 마음껏 공을 쳤다. 벽에 맞고 멈추면 근처에 드롭하고 칩샷 하는 게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이미림도 그랬다. 연장전에서도 그는 두 번째 샷 때 펜스를 겨냥해 그린을 넘겼다. 이어 칩샷으로 공을 홀 가까이 붙인 뒤 혼자 버디를 잡았다.

AP는 “푸른 벽이 그녀(이미림)를 멈추진 못했다”고 전했다. 미국 골프닷컴도 “벽이 없었다면, 이미림의 두 번째 샷은 벽 뒤쪽 물속에 빠졌을 거다. 이 벽이 메이저 대회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는 우승 직후 굵은 눈물을 흘렸다. 2014년 LPGA 투어에 진출한 그는 2017년 KIA 클래식 우승 이후 왼쪽 손목 부상으로 3년 넘게 우승이 없었다. 지난해에는 24개 대회에서 톱10에 두 번 들었다. 올해 6~7kg 감량하는 등 몸을 단련했고, 메이저 우승으로 결실을 봤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김지한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